2020.07.26 (일)

  • 구름많음동두천 23.2℃
  • 구름많음강릉 20.4℃
  • 구름조금서울 24.0℃
  • 흐림대전 22.8℃
  • 흐림대구 21.9℃
  • 구름조금울산 23.5℃
  • 흐림광주 21.3℃
  • 맑음부산 23.0℃
  • 구름조금고창 21.3℃
  • 맑음제주 23.8℃
  • 구름조금강화 23.5℃
  • 구름많음보은 21.9℃
  • 구름조금금산 21.8℃
  • 구름많음강진군 20.8℃
  • 구름조금경주시 22.2℃
  • 구름조금거제 22.8℃
기상청 제공

오피니언

대한민국 건국의 숨은 주역-서북청년회(2)

다시 읽는 《서북청년회가 겪은 건국과 6.25》/손진 지음, 건국이념보급회 출판부

 

 

좌익에 맞서다

 

2002년 SBS에서 방영한 드라마 ‘야인시대’는 인기를 끌었다. 손진은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김두한을 비롯한 실존 인물들과 인연이 있었다.

 

그는 신마적, 구마적, 김영태, 김무옥 등 드라마 배역을 비교적 잘 선정했다고 언급했다. 드라마는 일제강점기 주먹들의 세계를 연출했고, 해방 후 극중 인물이 사상 문제로 갈등하고 대립하는 내용을 다뤘다.

 

서북청년회에는 쟁쟁한 주먹들이 있었다. 그들은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에 맞섰고, 해방 후에는 반공 활동에 앞장섰다. 이화룡(평양), 이성순(일명 시라소니, 평북 신의주), 황병관(평양 대동강 동지회 훈련부장) 등이 서북청년회에서 활동했다. 특히 시라소니 이성순과 황병관은 많은 무용담을 남겼다.

 

황병관은 일본 메이지대학 레슬링 선수로 올림픽에 참가한 체육인이었다. 당시 도쿄에서 ‘메이지대 황(노고 짱)’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했다.

 

한번은 그가 친구들과 도쿄 시내 맥주 홀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일본 학생들과 시비가 벌어졌다. 일본 학생 10여 명은 그가 황병관인 줄 모르고 덤벼들었다. 황병관은 특별한 기술 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내던지며 “내가 메이지대 노고 짱이다”라고 외쳤다.

 

맥주 홀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순경이 달려왔다.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황병관은 순경이라고 해도 손에 잡히면 멀리 내동댕이칠 게 분명했다. 순경들은 궁여지책으로 소방서의 사다리를 가져왔다. 사다리로 어깨를 눌러서 그를 잡을 계획이었다.

 

그들이 황병관의 머리를 사다리에 꿰어 어깨를 누르려고 했다. 그때 황은 앗! 하는 기압과 함께 사다리를 양손으로 번쩍 들어 올려 머리를 뺐다. 그러고는 사다리를 풍차 돌리듯 빙빙 돌렸다. 사다리 양쪽 끝에 매달려 있던 순경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모여든 군중은 박수를 보내고 환성을 질렀다.

 

이때 관내 경찰 서장이 나타나 소리쳤다. “너 메이지대 황군이 아니냐. 취했구나. 나는 너의 선배다.”

황병관은 취중에도 ‘선배’라는 말에 정신을 차리고 마루에 꿇어앉아 머리를 숙였다. 서장은 순경에게 황병관을 숙소까지 데려다주라고 했다. 이 이야기는 당시 도쿄 학생들 사이에 큰 화젯거리가 되었다.

 

그런 황병관이 6.25 전쟁 때 부산 피란지에서 부산 깡패 마사이찌(고영목)에게 목숨을 잃었다.

1952년 5월경이었다.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에 맞서 서울 북쪽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피를 흘리던 때였다.

 

부산 광복동 다방에서 황병관과 마사이찌 사이에 사소한 시비가 벌어졌다. 물론 마사이찌는 황병관의 상대가 되지 못했지만, 부산에서 나름대로 알려진 오야붕(두목)이었다. 둘은 언쟁을 했고, 황병관이 그의 따귀를 한 대 갈겼다. 마사이찌는 도망가듯 자리를 떴다.

 

그는 서로 화해하라는 친구들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그날로 마사이찌 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마사이찌는 자기를 죽이러 오는 줄로 알고 그를 권총으로 쐈다.

 

천하장사 황병관이 그 자리에 쓰러지며 생을 마감했다. 당시는 큰 병원도 영안실도 없었다. 광복동 파출소 뒤 일본 절간에 빈소를 마련했다. 관·재계를 비롯해 체육인, 친지와 동지 등 문상객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날 문봉제(당시 치안 국장, 서북청년회 2대 위원장)가 손진 옆에서 시종일관 흐느끼고 있었다.

 

 

뜨거운 동지애

 

해방 이후 황해도 남쪽 지역이 북위 38선을 기준으로 남북이 나뉘었다. 해주는 이북 지역으로. 옹진반도 남부와 벽성군, 연백군 남부는 이남으로 들어왔다. 미군정은 이 지역을 경기도로 편입시켰다.

 

웅진군 송림면, 해남면, 동갑면 등지에 16개 서북청년회 면 지부가 조직되었다. 회원들은 38선을 넘어 보안서를 기습해 무기를 탈취하거나 악질로 소문난 공산당원을 살해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서북청년회 단원들이 희생되었다.

 

서북청년회는 동지애가 강했다. 한번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서북청년회 단원들이 38선을 넘어 보안서를 습격했다. 단원 한 명이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이틀 후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그날 밤 서북청년회 단원 네 명이 38선을 넘었다. 무덤을 파헤쳐 이틀 전 희생된 동지의 시신을 업고 돌아와 장례를 치렀다.

 

앞서 말했듯 남한 공산당은 서북청년회의 북한 실정 폭로 강연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서북청년회는 테러 집단이며 북한에서 쫓겨난 민족 반역 집단이다”라는 내용을 담은 유인물을 뿌리고 다녔다.

 

경남 밀양에서 서북청년회 단원들이 공산당에게 기습 공격을 당한 것도 시골 강연 때문이었다. 1947년 어느 늦은 가을이었다.

 

서북청년회 경남 밀양 지부 단원들은 각 지역을 돌며 계몽 선전 활동을 벌였다. 그날도 일을 마친 후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그 지방 공창원(공산주의 청년 동맹 조직)들이 죽창을 들고 기습을 했다.

 

식사 중이던 서북청년회 대원 7명에게는 절박한 순간이었다. 이때 공원태라는 단원이 “내가 이 문을 지킬 테니 빨리 뒷문으로 도망가라”고 외쳤다. 그는 다른 단원들이 달아날 때까지 문고리를 잡고 버텨서 시간을 벌었다. 잠시 후 적들은 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그는 혼자서 대항하다 목숨을 잃었다.

 

황해도 해주 출신인 공원태는 씨름 선수이자 유도 유단자였다. 체구가 크고 힘이 셌다. 항상 선두에 서서 싸웠다. 손진은 밀양으로 급히 달려가 시신을 수습해 장례식을 치렀다. 장례식장은 삼랑진, 김해, 마산 지부에서 달려온 단원들이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다.

 

그 과정에서 “당하면 반드시 보복한다”는 불문율이 되었다.   <계속>







외교

더보기

오피니언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