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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조선일보사 사장 조만식의 숙청(2)

- 북한지역이 공산화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며 남한행을 거부
- 해방 후 기독교 장로로 북한 내 민족주의 세력의 중심에 서있어

일제 조선강점기 일본의 명치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고 기독교청년연합회 총무, 신간회 평양지회장, 조선일보사 사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반일민족해방운동에 앞장섰고 조선물산장려회를 통하여 민족경제발전을 위해 헌신해온 조만식 선생은 해방이 되자 두 팔을 걷고 건국사업에 뛰어 들었다.

 

조만식 선생은 해방 후 우리나라에는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독립운동가 이승만 대통령과 백범 김구 선생과 함께 민족주의 운동의 3대 거목으로 그 명성이 자자했다. 특히 기독교 기반이 대단히 강했던 북한지역에는 민족주의 세력들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우세하였으며 당시 기독교 장로였던 조만식 선생은 북한 내 민족주의 세력의 중심에 서 있었다.

 

조만식 선생은 해방이 되자 평남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고 평양을 중심으로 한 북한지역에서 지도적 인물로 부상하였다. 해방될 당시 그의 나이는 62세였다. 공산주의자들이 머리를 쳐들기 전에 건국준비위원회를 창설하여 민족주의자들로 북한에서 주도권을 잡았지만 소련군의 북한주둔과 정치개입으로 북한의 민족해방은 시련의 시기가 닥쳐왔다.

 

소련공산당은 북한지역에 공산세력이 지배하는 국가를 세우려고 계획하였고 그 일환으로 해방이 되어 한 달이 지난 1945년 9월 19일에 소련군 극동사령부 88저격여단의 대대장이었던 김일성이 소련군함 ‘푸가초프호’를 타고 원산에 입항하였다.

 

소련공산당은 소련군을 북한지역에 진주시켜 북한의 정치, 경제, 외교 등 모든 영역을 지배하도록 하였다.

 

북한에서는 공산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 간의 보이지 않는 팽팽한 정치권력구도가 형성되었다.

 

김일성을 공산당 수뇌로 내세운 소련공산당에게는 반공민족주의자였던 조만식 선생이 불편한 존재였다.

 

그러나 북한을 장악한 소련공산당은 조만식 선생의 대중적 지반과 그의 뛰어난 정치적인 수완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이것은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모란봉구역에서 있었던 평양시 군중대회에서 김일성보다 조만식 선생이 먼저 연설을 한데서 찾아볼 수 있다.

 

조만식 선생도 소련군이 진주하여 북한에 공산세력을 확장하려는 움직임에 불만이 있었으나 건국의 이념 아래 공동의 목적을 위해 공산당세력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주둔군과 소련공산당의 협조 없이는 자신의 정치활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공산당뿐만 아니라 남한에 진주한 미군정에서도 조만식 선생의 영향력을 인정하여 조선인 지도자 11인 중의 한사람으로 군정장관의 고문관으로 임명할 정도였다.

 

해방 직후 조만식선생은 서울에서 민족지도자로서 활동해 달라는 당시 건국위원회 여운형 위원장의 요청을 받았지만 그는 북한이 공산화되는 것이 마음에 걸려 남한행을 단념하였다.

 

당시 북한에서는 소련군 대위였던 김일성이 소련군의 군정정치로 공산화로 질주하였지만 많은 북한주민들은 선전에 속아서 소련군을 해방군이라고 잘못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만식 선생은 소련군이 해방군의 탈을 쓴 점령군에 불과하다는 것을 재삼 강조하곤 하였다.

 

조만식 선생의 반공산주의적인 경향이 1945년 11월 3일에 조선민주당을 창당한 데서 여실히 드러나게 되었다. 조선민주당의 창당에 대해 북한을 지배하고 있던 소련군과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공산당에서도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은 조만식 선생의 대중적 지반과 그의 영향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만식 선생을 중심으로 한 조선민주당과 김일성을 지도자로 한 조선공산당은 해방 후 초기에는 서로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점차 갈등이 심해지기 시작하였다.

 

북한 전 지역을 장악하고 소련군정을 실시하는 과정에 소련군 병사들의 범죄행위가 빈번히 발생하면서 이에 대해 김일성은 자기의 상전이라는 이유로 말하기 꺼려했지만 조만식 선생은 지속적으로 항의하였다. 토지개혁과 신의주 학생봉기 사건 처리에서도 조만식 선생의 의견은 김일성과 소련군정을 자극하였다.

 

조만식 선생을 위주로 한 민주당과 조선공산당은 북한 건국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이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견실한 민족주의자였던 조만식 선생은 소련군 철수를 주장하면서 김일성이 이 제의에 동의하지 않자 그가 남북통일을 방해하고 있고 소련 붉은 군대를 위해 일한다고 비난하였다.

 

이러한 비난을 받으면서도 김일성은 조만식 선생을 당시로서는 제거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당시 민심을 장악하고 있었던 조만식 선생과 민주당의 영향력이 컸고 소련군 지도부도 그런 상황에서 조만식 선생에 대한 숙청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945년 12월 신탁통치를 공식화 한 모스크바 결정은 조만식 선생에게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자아내게 하였다. 조만식 선생은 1946년 1월 4일에 모스크바 결정을 논의하기 위해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 민주당은 물론 공산당 간부들과 소련 주둔군 간부들도 초청하였다.

 

그는 회의에서 자신이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으로 있는 동안에는 모스크바 결정에 찬동할 수 없다’는 주장을 피력하였다.

 

김일성은 조만식 선생을 두고서는 자기의 정치권력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소련군을 사촉하여 그를 연금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북한에서 공산당에 의한 민주당의 첫 탄압의 시작이었고 일당독재의 서막이었다.

 

조만식 선생의 연금으로 그를 따르던 한근조, 이윤영 등 많은 민족해방, 애국투사들은 소련군 주둔과 공산당이 판을 치는 북한을 포기하고 남한 행을 택하였다. 평안남도 강서군 태생인 한근조선생은 일본 메이지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변호사로 활동하였던 민족주의자로서 남한에 내려와서 대법원장을 하였으며 평안북도 녕변군 출신인 이윤영 선생은 남한에 내려와 대한민국 제1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조만식 선생은 북한지역이 공산화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며 남한행을 거부하였다. 모스크바 결정을 실행하기 위해 조직된 미소공동위원회의 소련측 대표를 맡은 스티코프도 1946년 2월 초 조만식 선생을 찾아가 설득을 시도하였으나 그의 고집은 꺾을 수 없었고 이후 김일성은 북한 정치권력에서 조만식의 영향력을 없애기 위해 악랄하게 획책하였다.

 

조만식 선생은 연금생활을 지속하는 동안에도 밀사를 통해 미군정 및 우익지도자들과의 연락을 주고받으며 활동을 계속하였다.

 

6.25전쟁을 앞두고 북한정권은 남한 형무소에 수감되어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던 남노당 지도자인물이었던 김삼룡과 이주하를 조만식 선생과 교환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것은 전쟁 전에 남로당의 고위급 지도자들을 구해내려는 의도였으나 이 교환문제는 성사되지 못하였다.

 

김일성에 의해 전쟁이 발발하면서 조만식의 생사는 북측의 수중에 놓이게 되었고 1950년 10월 18일에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후퇴하게 된 북한정권은 조만식 선생을 총살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67세였다.

 

6.25남침전쟁을 계기로 한국에 월남한 실향민들은  '고당전, 평양지간행회'를 조직되었고 1965년에는  '고당의 날'기념준비위원회가 주최한  「고당경모회」행사가 거행되었다. 

 

그리고 광복 25돌을 맞으며 1970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최고의 훈장인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1976년 12월 어린이 대공원에 그의 제1동상, 1992년 10월에 오두산 통일전망대에 제2동상이 건립되었다. 현재 중구 저동에 고당 조만식 선생 기념관이 있다.

 

 

일당독재로 3대세습을 지속하는 김씨 왕족의 첫 희생물로 숙청된 조만식 선생의 삶은 진정한 민족해방을 위한 삶이었다. 김일성에 의한 조만식 선생의 숙청은 연안파, 소련파, 갑산파 등 정치적인 견제세력에 대한 숙청으로 이어져 왔으며 김정일에 이어 김정은의 무자비한 숙청의 역사는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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