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11 (수)

  • 흐림동두천 7.4℃
  • 구름조금강릉 12.3℃
  • 연무서울 8.9℃
  • 연무대전 10.6℃
  • 대구 14.8℃
  • 맑음울산 16.5℃
  • 박무광주 9.9℃
  • 맑음부산 15.9℃
  • 구름많음고창 9.8℃
  • 연무제주 16.0℃
  • 맑음강화 7.4℃
  • 흐림보은 8.7℃
  • 흐림금산 9.9℃
  • 흐림강진군 11.1℃
  • 구름많음경주시 16.8℃
  • 맑음거제 15.3℃
기상청 제공

스포츠

야구의 역사... ’그라운드의 작은 탄환’ 김일권

- 군상상고 졸업 후 드라마틱한 야구 삶을 산 남자
- KBO리그 10년 동안 5번 도루왕
- KBO리그 최초 300도루 달성(통산 363도루)

17세기가 낳은 최고의 작가로 평가되는 발타자르 그라시안은 이런 말을 했다.

 

사랑했던 시절의 따스한 추억과 뜨거운 그리움은 신비한 사랑의 힘에 의해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게 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과거의 소중함과 그 시대에 뜨거웠던 열정을 무시한 채 오로지 현재에서 티격태격 한다. 그러나 과거 없는 오늘이 없고, 원인 없는 결과가 없듯이 2019년 뜨거운 다이아몬드 그라운드를 일찍이 불 지핀 이들이 있었으니, 지금부터 그들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올드 야구팬들이 모이면 엄마 배 속에서부터 야구를 배워 가지고 나온 선수들이 있다. 앞으로도 있을까 싶은 걸출한 선수들이 바로 장효조·김재박·배대웅·김일권이다는 얘기를 종종 한다.

 

당대의 최고 투수였던 남우식황규봉·최동원·선동열 등이 인구에 회자되지만, 야수선수들 중에서 엄마 배속에서 야구를 배워 왔다고 할 정도로 천부적 소질을 가졌다고 평가받는 대표적인 선수들을 뽑으라고 한다면, 단연 이들 4명에 다들 동의할 것이다. 적어도 스스로 올드 야구팬, 또는 한국 야구의 역사를 좀 안다고 자부한다면...... .

 

시리즈 네 번째이자 마지막 편인 김일권 선수의 이야기다.


 

한국 야구사에서 빠른 발과 재치 있는 플레이를 보여 준 선수를 꼽으라면 올드 야구팬들 사이에서는 단연 김일권이다. 이후 이종범이라는 걸출한 선수가 배출되기도 했지만 그 이전까지는 팬들 사이에서 야구 센스 하나는 타고났다고 했던 선수가 바로 김일권이었다.

 

요즘 한국프로야구가 위기라고 한다. 그 원인 중에서 선수들이 몸을 너무 사려서 도루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김일권은 원년 1982년을 포함해 무려 다섯 차례(1983·1984·1989·1990) 리그 도루 1위를 기록했다.

 

김일권은 해태타이거즈·태평양돌핀스·LG트윈스 소속으로 10시즌 동안 현역으로 뛰면서 절반 시즌을 도루왕으로 이름을 날렸다.

 

김일권은 1956년생으로 전라북도 군산시 둔율동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교육 행정 공무원으로서 그리 가난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렸을 때 성격은 내성적. 수줍음도 잘 탔다. 뒷집 심술쟁이 아이가 꼬집고 때려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남과 다투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턱 아래 흉 자국도 그때 흔적이란다. 그럼에도 만능 스포츠맨이었던 아버지를 닮아 운동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다고 한다.

 

군산 남초등학교 4학년 때 특별활동을 통해 야구를 시작했다. 글러브를 끼면 힘이 솟고 동작도 빨라졌다는 그는 투수와 3루수를 겸했다.

 

당시를 회상하면서 모 언론사와 인터뷰 한 내용이다.

저는 1962년 군산 남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그때는 누가 짓궂게 굴어도 대들기는커녕 말도 못하는 순둥이였죠. 그래도 야구연습을 할 때는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기가 솟고 동작도 빨라졌습니다. 4학년 때 특별활동을 통해 야구를 시작해서 투수와 3루수를 겸했는데, 그때부터 영호남 대회를 2연패 하는 등 운동장을 누볐죠. 뒷산(모시산)을 몇 번씩 오르내리는 고된 훈련도 투구와 타격연습을 생각하면 힘든 줄 몰랐으니까요.”

 

그의 야구 인생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면 이용일 전() KBO 총재 대행일 것이다. 당시 이용일 전북 야구협회 회장은 군산 남중·상고 김병문 교장과 함께 김일권, 송상복, 양종수, 조양연, 김기철 등 선수 11명을 눈여겨보고, 1968년 창단한 군산남중학교에 야구 특기생으로 입학을 시켰다.

 

이들 중 김일권, 송상복, 양종수, 조양연 등은 3년후 나란히 군산상고에 입학한다.

 

그때를 회상하며 김일권은 모 언론사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1971년 군산상고(야구부 4)에 진학해서 3학년 선배들의 '줄빠따'(매타작) 때문에 고생 많이 했습니다. 오죽했으면 1, 2학년생들이 중국집에 모여 짜장면 한 그릇씩 먹고 도망가자고 모의를 했겠어요. 저는 서울로 튀었다가 사흘 만에 잡혀와 엉덩이에 불이 나도록 맞았죠(웃음). 3학년 10명으로부터 두 대씩, 스무 대 맞으니까 얼얼하더군요. 그렇게 매타작을 당하면서 '반항심'이랄까, 상대에게 모순점이 보이면 따지기도 하는 등 성격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연습은 죽어라 했죠.”


   

야구계에서 군산상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 역전의 명수. 영화 ! 지금부터야’(1977) 는 당시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고교야구를 그린 영화다.

 

실제 이 영화의 모델이 된 승부가 있다. 1972719황금사자기 고교야구결승전이다. 당시 창단 4년째인 군산상고와 영남의 강호 부산고등학교는 7회까지 11로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8회초 부산고가 3점을 뽑아내며 모두가 부산고가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을 때, 9회말 군상상고의 마지막 공격이 시작되었다.

 

6번 선두 타자가 안타를 치고 1루에 나갔다. 그러나 다음 타자가 아웃 되고, 남은 타자는 야구 타순에서 가장 약하다고 하는 8번과 1번 타자를 연결해 줘야 하는 9번 타자였다. 누가 봐도 패색이 짙었다.

 

그런데 갑자기 부산고 투수가 흔들렸다. 8번과 9번 타자 연속으로 볼넷을 내주어 만루가 되었다. 1번 타자 김일권이 들어섰다. 공이 몸쪽으로 왔고 그는 피하지 않고 히트 바이 피치 볼(Hit by pitch ball)1루로 걸어 나갔다. 이제 스코어는 42.

 

2번 타자 양기탁이 2타점 중전 안타를 쳐 승부를 원점으로 돌려놨다. 이날의 승리 마침표를 찍은 선수는 3번 김준환이었다. 노 볼 투스트라이크라는 불리한 볼 카운트에서 끝내기 안타를 때렸다. 54 군산상고의 승리였다.

 

이 경기는 야구사에 명승부로 남은 몇 경기 중 한 경기였다. 이때부터 야구팬들 사이에서는 군산상고가 역전의 명수로 불려졌다. 훗날 프로야구팀 해태타이거스(. 기아타이거스) 창단 멤버에는 군산상고 출신들이 다수 있었다. 김봉연, 김준환, 김일권 그리고 이들의 후배인 김성한이다. 이후에도 스타 선수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조계현, 이광우, 정명원, 조규제, 정대현, 차우찬 등이다.

 

1973년 군산상고는 전국규모 대회에서 4강에 한 번도 들지 못했다. 그러한 팀의 부진 속에서도 김일권은 한국고교야구 대표팀에 선발되는 등 신기에 가까운 타격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해 12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한다.

 

1958년 제정된 이영민 타격상은 대한야구협회가 매년 3회 이상 전국대회에 출전해서 30타석 이상 기록한 고교선수 가운데 타율이 가장 높은 선수에게 수여하는 영예로운 상이다. 김일권은 그해 전국대회에서 30타석 이상 선수 중 가장 타율이 높은(0.415) 선수였다. 전국대회 4회 출전하여 41타수 17안타를 기록했다.


 

1998년 타계한 당시 군상상고 최관수 감독과 함께 그 시절을 회상하며 인터뷰 한 내용이다.

최관수 감독님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죠. 고급 전술과 타법을 터득한 것은 물론이고요. 지리멸렬했던 팀을 국내 정상 수준으로 올려놓은 지도력,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 등이 놀라웠죠. 특히 '한문과 주산은 꼭 배워두라!'는 당부는 잊지 못합니다. 그때 배운 실력이 지금도 사회생활에 도움이 되고 있거든요. 가끔 옛 모습이 떠오르면서 건강하셨으면 해태 타이거즈 초대 감독을 맡았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김일권은 19746월 세계 아마야구선수권대회를 시작으로 해마다 국가대표에 선발되어 중심타자로 실력을 발휘했다. 1975년 몬트리올 대륙간컵 야구대회, 19766월 네덜란드(할렘) 국제야구대회, 197612월 콜롬비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1977년 니카라과 마나과 경기장에서 개최된 제3회 슈퍼월드컵(대륙간컵) 야구대회 등 해마다 국가대표(1974~1981)였다특히, 1977년 슈퍼월드컵(대륙간컵) 야구대회에서 3번 김봉연에 이어 4번 타자로 나섰다. 5번 타자는 장효조였다고 하니 그의 야구 소질이 천부적이라는 말이 결코 틀리지 않은 것 같다.


 

1978년 네덜란드 국제초청야구대회(813~21)에 출전한 그는 대회 9일째 경기(한국-호주)에서 3회 말 솔로 홈런을 터뜨려 승리(8-3)에 불씨를 당긴다. 한국, 일본, 호주, 네덜란드, 쿠바 등 5개국이 더블리그로 겨뤘던 대회에서 한국은 쿠바에 2연승을 거두면서 2위를 차지했다. 한국 대표팀이 아마야구 최강으로 꼽히는 쿠바를 이긴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해(1978) 이탈리아에서 개최된 제25회 세계선수권대회(825~96)에서도 승리의 주역이 된다. 리미니구장에서 벌어진 8차전(한국-니카라과). 한국은 심판의 편파판정으로 7회까지 2-3으로 뒤졌다. 그러나 7회 말 장효조, 김재박, 배대웅의 연속 안타로 만든 1사 만루 찬스에서 김일권은 주자 일소 3루타를 작열시켜 전세를 5-3으로 뒤바꾼다. 이날 경기 결과는 한국의 통쾌한 역전승(6-3)으로 기대 이상의 성적을 낸다.

 

당시 한국은 상위권 진입이 어려울 것이라는 야구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벨기에, 캐나다, 니카라과, 일본, 이탈리아, 호주, 멕시코, 네덜란드 등을 연파하고 3(82)에 오른다. 특히 한국은 일본을 역전승으로 물리치는데, 국제대회에서 한국이 일본을 이긴 것은 19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 우승 이후 두 번째였다. 당시 대표팀은 두 대회를 통해 한국야구가 세계 수준이라는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특히 1980년 일본 동경에서 열린 제26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822~95)에서 도루 18개를 기록, 이 부문에서 세계선수권대회 신기록 보유자가 된다. 득점부문에서도 18점을 획득 2관왕을 차지한다. 그때까지 최다 도루 기록은 파나마의 밀러(11)와 일본의 오바(大場勝: 20)가 세운 14개였다. 타격에서도 한국 선수 중 가장 높은 476(전체 3위에 랭크)로 주최국 일본과 공동 준우승(92)을 거두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군상상고를 졸업하고 실업야구 팀인 상업은행에 갔으나, 대학에 가고 싶은 열망에 고등학교 졸업한 지 3년 만에 한양대에 들어간다.

 

김일권은 이때를 모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을 한다.

“1974~1976년까지 상업은행 소속이었는데, 대학 진학의 꿈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체육특기자 혜택 기간이 3년이었거든요. 상의할 사람은 없고, 속만 태우다가 하루는 장태영 감독님에게 대학에 가고 싶다고 했더니 단칼에 '안 돼!'라고 하시더군요. 해서 '감독님은 옛날에도 명문인 서울대학 나오신 것으로 아는데, 왜 저는 안 된다고 하시는 겁니까?'라고 물었더니 아무 말씀도 없으신 거예요. 지금 생각해도 어린 나이에 당돌하고 건방졌죠(웃음).”

 

한양대학교에서도 출중한 활약을 펼쳤으나, 1학기만 마친 채 납치와 진배없는 형태로 군에 입대(육군 경리단)했고, 제대 후 다시 실업야구(포항제철)로 돌아가려 했으나, 여의치가 않았고, 한양대학교로 복귀할 마음도 없어서 무적 선수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야구 센스가 있어 대표팀에는 계속 뽑혔다.(상기 기사 내용 참조.) 결국, 19812학기에 한양대학교에 복학한다.

 

198159일 중앙일보에는 <김일권, 한양대 복귀>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국가대표야구팀 1번 타자로 80년 동경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도루왕의 타이틀(18)을 차지했던 김일권(27)이 한양대 2년에 복교, 8일 대한야구협회에 선수등록을 마침으로써 다시 그라운드에 서게됐다. 김일권은 한양대 1년에 재학 중이던 77년 육군에 입대, 경리단 소속으로 활약하다 806월 제대와 함께 실업팀인 포철로 이적을 시도했으나 야구협회선수등록규정 11조 다항에 걸려 등록하지 못한 채 한때 그라운드를 떠나있었다.

 

한양대 복학후 1982년 서울 세계야구선수권 대회를 앞두고, 큰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언론에 대서특필 되었던 선수촌 무단이탈사건이다. 김일권은 모 언론사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상한다.

태릉선수촌에서 훈련받던 198112월 어느 날 아내가 이삿날을 잡았다고 연락을 해왔어요. 마침 일요일이어서 어우홍 감독에게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다녀오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배성서 코치가 막는 겁니다. 감독님과 김충 코치에게 외출 허락을 받았다고 했더니 모멸감을 주면서 입에 담을 수 없는 쌍욕을 하는 거예요. 자기는 국가를 위해 신혼여행까지 반납해가며 대표선수 생활을 했다면서···.

 

저도 처자식이 있는 놈인데, 듣고만 있을 수 없어 배성서 코치와 한판 붙었죠. 김충 코치는 말리구요. 자존심도 상하고, 분노가 치밀어 이해창(주장) 선배에게 ', 나 대표선수 그만할래' 하고는 그날 밤 자정쯤 보따리를 싸서 나왔죠. 그게 지금도 회자하는 '대표팀 무단이탈'이에요. 이삿짐을 나르고 다음날부터 스포츠신문들이 무책임한 타이틀로 기사를 써대는데 누구에게 하소연도 못 하고 죽고 싶더군요. (한숨)”

 

그 후 훈련에 불참한 김일권은 프로야구 입단을 밝히면서 자신을 국가대표에서 제명해 달라고 청원하기까지 했지만, 호남 팬들의 대대적인 서명운동과 한양대 자퇴, 야구협회의 제명 등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198228일 중앙일보에는 <해태훈련 합류>라는 제목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있다.

대표팀 이탈 김일권 선수. 국가대표 야구팀의 대만 전지훈련에 불참. 물의를 빚었던 김일권 선수(26·한양대 1)가 프로야구 해태타이거즈의 광주 동계훈련에 합류, 충격파를 던지고 있다. 김은 프로 입단을 위해 지난 127일 국가 대표팀이 오는 9월 서울에서 벌어지는 제27회 세계 야구선수권 대회에 대비하여 실시한 대만 전지훈련을 거부, 말썽을 일으키더니 6일 광주에서 해태 타이거즈의 유니폼을 입고 훈련에 참가 한 것이다.


한국야구위원회(KBO)가 국가대표 선수들은 오는 9월 세계대회가 끝날 때까지 프로입단을 유보한다는 선언에도 불구하고 김이 이같이 프로팀의 훈련에 참가한 것은 큰 문제점이 되고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해태 측은 김과 계약을 체결하지는 않았으며 김이 해태 입단을 희망해와 연습만을 같이하도록 허용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한편 대한야구협회 허종만 전무는 대표선수가 대표팀의 전지훈련에는 불참하고 프로팀의 훈련에 참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KBO를 통해 이 문제를 논의하겠다고 말했다.

 


그러한 사연을 뒤로하고 동향 연고팀인 해태타이거즈에 원년 멤버로 입단하게 된다.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에 그는 53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원년 도루왕이 된다. 이때 그는 두 번의 놀라운 기록을 달성한다. 첫 번째는 718일 광주무등야구장에서 벌어진 OB베어스와 경기에서 KBO리그 최초로 한 경기 개인 최다 도루 5개 기록을 달성한다. 그리고 며칠 후 721일 인천 숭의야구장에서는 삼미슈퍼스타즈와의 경기에서 7회초 홈스틸을 기록한다. 44 동점인 가운데 홈스틸 성공으로 결승점을 올리는 수훈선수가 되었다. KBO리그 1호 홈스틸이다.


 

1983년 역시 1번 타자로 명성을 날리면서 그해 926일 삼미슈퍼스타츠와 경기(인천구장)에서 6회초 안타를 치고 1루에서 2루 도루로 KBO리그 개인 통산 첫 100도루를 달성게 된다. 이 기록은 자신의 시즌 100번째 안타를 치고 세운 기록이어서 의미를 더했다. 한편, 이 경기는 1시간47분이라는 최단시간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해 48개의 도루로 2년 연속 도루왕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해 해태타이거즈는 창단 후 첫 우승을 한다.

 

1984424일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트레이드 대상 김일권 벌금·각서쓰고 팀합류>라는 제목이 눈에 띈다.

해태타이거즈는 24일 트레이드 대상으로 내놓았던 김일권을 25일부터 팀에 합류시키기로 결정했다. 김일권은 벌과금 150만원을 물고, ‘또 다시 문제를 일으킬 경우 야구를 그만두겠다는 각서를 구단에 제출했다


이 내용을 좀 더 알아보면 지금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당시 풍토로서는 그야말로 기행적인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고나 할까?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1983년 한국시리즈 우승에도 불구하고, 해태타이거즈 구단은 연봉에 인색했기 때문에, 선수들 간에 자연스럽게 불만이 쌓여 있었다. ’84년 시즌 개막을 앞두고 구단주와의 회식에서 선수들이 불고기를 안 먹고 불판에 그대로 올려놓은 채로 태워버리는 소위 불고기 화형식을 했다.

 

상업은행에서 한양대학교 진학, 그리고 군 제대 후 한양대 복귀 거부에 따른 무적 선수, 또 다시 한양대 복귀, 이후 프로야구 선수로 이어지는 그의 기행으로 이단아 취급을 받았던 탓인지 그가 주동자로 찍혔었다. 구단 관계자들은 크게 화를 냈고, 당시 해태타이거즈 김응용 감독에게도 미운털이 박혀 ’84년 시즌 초반 트레이드 대상이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맞이한 ’84년 시즌에서 타율은 낮았지만 41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도루왕 3연패를 이루어냈다.

 

1986년 한대화가 OB베어스에서 트레이드 되어 오면서 그는 팀에서 입지가 점점 좁아졌다. 하지만 그해 821일 삼성라이온즈와 경기(광주 무등야구장)에서 6회에 중전안타를 치고 2루 도루를 하면서 시즌 19번째 도루이자 KBO리그 최초 개인 통산 200도루를 달성한다. 그 후, ’87년 시즌에는 이순철이 3루수에서 중견수로 이동, 김일권은 팀에서 입지도 좁아졌을 뿐더러 타율과 도루에서 부진을 면치 못했고, 결국 태평양돌핀스팀에 현금 트레이드 된다.

 


1988년 태평양돌핀스에서 생애 첫 3할 타율을 기록하며 그야말로 화려한 부활을 한다. 특히, 규정타석을 채우고도 삼진을 8개밖에 당하지 않았다. 이는 프로야구 시즌 최소 삼진으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기록이다. 이어 ’89년 시즌에는 무려 62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도루왕이 된다.

 

그리고 그해 97일 해태와의 경기(인천구장)에서 5회와 7회 도루 성공을 시켜 KBO리그 최초 개인 통산 300도루 기록도 작성한다. 또한, 태평양돌핀스(19871031일 청보핀토스 인수, 청보핀토스 이전 팀은 삼미슈퍼스타즈) 팀 이름으로 첫 포스트시즌에 진출을 하는 쾌거를 이룸과 동시에 그 역시 골든글로브를 수상한다.


 

1990년에는 적지 않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48개의 도루를 기록하고 다섯 번째 KBO리그 도루왕이 된다. 그리고 시즌을 앞두고 LG트윈스로 트레이드 된다. 91년 시즌에서 그는 타율 151리라는 매우 부진한 성적을 거두게 되고, 시즌 후 36세의 나이로 은퇴(1992)를 하게 된다.


 

은퇴 후, 쌍방울 레이더스 주루코치(1993~1995), 해태 타이거즈 주루코치(1996~1997), 현대 유니콘스 주루코치(1998), 삼성 라이온즈 주루코치(2002~2004), 야구 해설위원 등을 거쳐 현재는 판촉물 제조업체에서 대표이사로 재직 중이다.



호타준족그리고 그라운드의 탄환 김일권 선수는 아직도 전설적인 훔치는 선수로 많은 팬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앞의 세 선수가 그랬듯이, 역시 선수는 그 무엇보다도 기량’(技倆)으로 팬들에게 평가와 사랑을 받는다는 스포츠계의 정설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된다.


   

김일권을 마지막으로 올드 팬들에게 엄마 배 속에서부터 야구를 배워 가지고 나왔다는 평을 듣는 대표적인 선수 4(장효조 전 감독, 김재박 전 감독, 배대웅 전 코치, 김일권 전 코치)의 경기력과 신상 열전에 대한 연재를 마치고자 한다.

 

() 장효조 감독의 영면을 기원하면서, 또한 3인의 건승과 함께 이들이 언젠가는 다시한번 대한민국 야구를 위해 어떤 형태로든 큰 이바지를 해 줄 것을 기대하고 기대해 본다.












<리버티코리아포스트 후원 https://www.ihappynanum.com/Nanum/B/7ZHA9PYYY1  >



배너




미디어

더보기

LIFE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