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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칼럼

리버티 단상(2) 서울에서 만난 '북한 사람들'

-종로 회상
-오해와 이해
-'북한 여자'

종로 회상

    

 


 

회사는 종로에 있었다. 종로에서는 노숙인을 쉽게 볼 수 있다. 탈북민은 그들과의 첫 대면을 어떻게 기억할까. “남조선에 왜 이리 꽃제비가 많은가?”라고 놀라지는 않았을까.

노숙인을 보호소로 데려가도 곧 밖으로 나와 상자 골판지를 콘크리트 바닥에 깔고 잠을 청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들은 어쩌면 깨끗한 잠자리와 거르지 않고 찾아오는 끼니 대신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자유를 선택했을지도 모르겠다.

 

종로는 젊은 날의 추억이 있는 곳이다. 나는 종로에서 친구를 만났다. 종로서적 앞에서, ‘파이롯트 만연필이나 금강제화 대리점 앞 인파에 밀려 친구를 기다렸다. 아직 여드름 자국이 있는 앳되고 어린 시절이었다. 종로에서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영화를 보거나 거리를 걸었다.


우리는 종로 2카미유 클로델이라는 커피숍과 인사동 , 자네 왔는가라는 전통찻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때 무슨 이야기를 한 것일까. 지난 일과 막 닥친 일 그리고 앞날을 이야기했다. 답을 얻을 수 없는 문제를 고민했다. 다만 수다스럽지 않았다. 같이 있어 좋았다. 간혹 우리의 놀이가 궁금해 다른 동년배나 선배가 끼어들곤 했지만, 금세 흥미를 잃은 듯했다. 그렇게 젊음을 누렸다.

젊은 날 헤매었던 거리는 기억의 빈자리로 남았다. 함께했던 친구도 이젠 없다. 자고 일어나면 부르던 그 이름이 너무 멀다. 봄볕 좋은 어느 날 잠시 종로 한복판에 나갔다가 오래전 친구가 저만큼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 곁에는 나도 있었다. 풋풋한 웃음이 한가득 피어 있었다.


오랜 시간 종로를 잊고 살았다. 다시 종로에서 북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종로의 옛 모습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들 눈에 비친 종로는 꽃제비가 활보하는 낡은 거리일지도 모른다.

김광섭의 <저녁에>라는 시에는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구절이 나온다. 김환기 화백은 김광섭의 시에서 영감을 얻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작품을 남겼다. 그의 그림은 수많은 점의 나열이다. 빼곡한 점과 점은 서로 만나고 헤어진다. 나도 한 점이 되어 또다시 종로에 와 있었다.

 

종로는 노년기에 접어든 것 같다. 건물도 사람도 함께 나이든 느낌이다. 낙원동 인근 풍경은 주름진 얼굴이다. 늘어선 이발소 안에는 염색약을 바른 노인 여러 명이 앉아 있다. 좌판 위에 돋보기나 오래된 중고 물건을 가지런히 올려놓고 파는 이들도 있다. 돼지국밥이나 순댓국, 냉면을 파는 음식점이 여럿 모여 있다.

거리의 낡은 건물과 늙은 사람이 이루는 조화가 머쓱했다. 낡음과 늙음을 반길 이가 몇이나 될까. 그것은 쓸쓸하고 안쓰럽다. 그러나 누구든 늙음을, 무엇이 되었든 낡음을 거쳐야 한다. 낡음은 고칠 수 있으니 좀 낫다. 늙음은 고칠 수 없다. 받아들이는 수밖에.

지난 젊은 날을 떠올리며 늙음에 대한 생각을 고쳐먹는다. 젊음이 삶의 빛이었다면, 늙음도 또 다른 빛일 수 있지 않을까. 낙원동의 풍경은 내 눈이 보지 못하는 빛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알지 못하는 것이 아직 많다고 생각한다. 스무 살 무렵 세상을 다 안다고 여겼듯 나는 지금도 그렇게 대단한 착각을 하고 살고 있구나, 또 생각한다.

      

오해와 이해

 

건물 2층은 식당, 3층은 식품 제조회사, 4층에는 사무실이 있었다. 나는 아래위층을 오가며 일을 했다. 직원들은 그런 나를 총무라고 불렀다. 그들은 협업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같은 회사에 다니므로 서로 도와야 한다고 여겼다. 역할이 분명히 구분되는 생활에 익숙한 나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육체노동을 하는 그들에게 내 일의 많고 적음을 설명하기 어려웠다.

6개월 만에 그만두겠다는 말을 꺼냈다. 바쁜 일상에 대해 겁이 났다. 대신 일할 사람을 구했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못 나온다는 말을 전했다. 나는 다시 시작해 보기로 했다. 느슨하게 풀어진 운동화 끈을 단단히 조이듯 제대로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나는 북한에서 살다 온 동료들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들과 어울려야 했다. 입사 초기에는 때때로 식당에서 서빙을 하고, 계산대를 보며 일을 도왔다. 기름 쓰는 일을 돕다가 몇 벌의 옷을 버렸다. 그들과 함께 무거운 짐을 날랐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사실 돕는 시늉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몸 쓰는 일에 어색한 감정과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땀 흘리며 바쁘게 움직여서인지 앓아오던 허리 병을 회복할 수 있었다. 해가 될 줄 알았던 일이 복이 돼서 돌아온다는 말뜻을 알 듯도 싶었다.

한번은 아이가, “친구 엄마가 엄마 직업이 뭐냐고 물어봤어라고 말했다.

아이가 뭐라고 말했을지 궁금했다.

그래, 뭐라고 대답했니?”

우리 엄마는 북한 사람들하고 일한다고 했지.”

의아한 표정을 지었을 아들의 친구 엄마를 떠올리자 웃음이 났다.

회사에서 일하는 탈북민들은 이따금 해결하기 어려운 일을 겪어야 했다. 문제는 갑자기 발생했다. 특히 상대방 의견을 듣고 자기 이야기를 해야 하는 일련의 과정이 만만치 않다.

식당에서도 종종 문제가 발생했다. 음식을 먹고 돈을 내지 않겠다고 생떼를 쓰는 사람, 술주정하는 사람을 상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구청 보건소 직원을 비롯해 전기나 가스 기술공에 이르기까지 외부에서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든다. 북한 사투리에 익숙지 않은 외부인은 그들이 화를 내는 거라 오해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별것 아닌 일이 싸움으로 번졌다.

직원들은 문제가 발생하면 남한 사람인 나를 찾곤 했다. 일을 마무리 짓고 나면 동료들은 환하게 웃으며 안도했다. 꼭 필요한 사람이 된 듯해 뿌듯했다.

여자들만 있는 회사였다. 여러 어려움이 있었다. 해보지 않던 일을 떠맡게 되었다. 전구를 갈아 끼우며 감전이 될까 봐 겁을 먹기도 했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짐짓 경험자인 듯 굴기도 했다.

오래된 건물이라 툭하면 시설에 문제가 생겼다. 화장실이 자주 막혔다. 월요일에 출근해서 보니 화장실이 물바다였다. 주말 내내 문제 해결을 뒤로 미루고 일한 그들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나는 때로 그들의 이기심에 놀라기도 했다. 그 놀람은 그들을 남한 사람과 다르게 순박하게만 보려고 한 데서 비롯된 것 같다. 더욱이 내가 만난 북한 사람들은 어린이처럼 자신의 이기심을 감추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본성이 도드라져 보이는 이유다. 그러므로 탈북민이라서 그렇다라는 의견은 비약이다.

북한 동료들은 이런저런 요구를 해 나를 번거롭게 했다. 묵묵히 들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꽤 고집도 세고 성깔도 있는 편이다. 그런 나에게 그들은 마음씨 고운 총무라고 말해주었다. ‘곱다라는 단어는 참 예쁜 말이다. 어쩐지 그 말 때문에 고와지는 듯했다. 나는 이따금 그 문장을 떠올린다. 그 말을 하며 미소 짓던 고운 얼굴을 떠올린다.

왜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을까 생각해 본다. 나는 의지가 되는 한국 사람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나는 좀 감상주의자다. 그래서 하나하나 쉬운 게 없다.

2년쯤 지나 비영리 단체 일이 많아졌다. 식당 일을 도울 틈이 나지 않았다. 직원들은 그런 사정을 이해해 주었다. 조금은 어색한 총무라는 이름표가 없었다면, 그들과 가까워질 수 있었을까. 모든 일이 결과적으로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이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북한 여자

   

 

아이를 기를 때였다. 나는 아이를 포대기에 업는 것조차 어려워했다. 시어머니가 아이를 훌쩍 업어 쉽게 동이는 모습이 신기했다. 그 기술을 배우려고 몇 번을 시도했지만, 아이가 등에서 줄줄 내려와 포기해야 했다. 요즘은 옛날처럼 아이를 포대기에 싸서 등에 업는 기술은 없어도 된다. 아이 업는 띠가 잘 나와 있기 때문이다.

북한 여성들은 아이를 포대기에 둘러업는 모양과 비슷하게 짐을 진다. 그들의 노동은 아이를 업은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짐을 짊어지고 장마당에 나가 장사를 했을 것이다. 다시 아이를 둘러업고 국경을 넘었을 것이다. 그들은 낯선 땅에서 또 아이를 업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아파도 병원에 가려고 하지 않았다. 참는 게 미덕인 듯 살아온 우리네 할머니, 어머니 같았다. 언젠가 한 직원이 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도 꽤 다친 듯해 화들짝 놀랐다. 그는 별것도 아닌데요라며 웃고 만다. 그래도 병원에 가보라고 재촉하자, 얘기를 꺼내 놓았다.

밤에 너무 아파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앓는 소리를 내면 나그네(남편)가 뭐라고 할 것 같아 밖에 나와 한참 있다가, 아침에 할 수 없이 병원에 갔다 왔어요라고 했다. 나는 왜 좀 더 일찍 병원에 가지 않고 고생을 했냐고 잔소리를 했다. 그러자 그는 조금만 다쳐도 병원에 가는 한국 사람을 이해할 수 없어요라며 오히려 타박을 놓았다.

 

북한 사람들의 밥상은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들은 물에 밥을 말아 먹곤 했다. 내 할머니, 어머니도 그렇게 찬밥을 물에 말아 먹었다. 김치 한 가지 반찬에 밥을 먹는 엄마의 모습은 어린 내 눈에도 쓸쓸해 보였다.

북한 동료에게 물에 말아 먹으면 소화하는 데 좋지 않아요라고 하면, “우린 이게 습관이 돼서라고 말했다.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가 먹고 있는 게 밥일까, 고단함일까.’

밥상에는 썰지도 않은 길쭉한 대파가 올려져 있었다. “그걸 그냥 드세요?”라고 물으면, 그들은 어린애처럼 웃으며 우린 이렇게 먹어요라고 말했다. “이게 북한식이에요?”라는 또 다른 물음에 그들은 중국에서 이렇게 먹었어요라고 했다.


북한 여성들은 돈을 벌기 위해 남편과 자식을 두고 강을 건넌다. 탈북민에게 강을 건너 국경을 넘은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공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상황을 쉽게 떠올릴 수 없었다. 그들의 탈출기는 지나치게 극적이라서 오히려 현실감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별하는 남녀의 애절한 마음을 담은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라는 고대가요가 있다.

 

새벽에 배를 타고 나간 뱃사공 곽리자고가 흰 머리를 풀어헤친 어떤 미친 사람(백수 광부)이 술병을 들고 물을 건너는 것을 목격한다. 그의 아내가 쫓아가며 말리고 있다. 남자는 아내의 말을 듣지 않고 강을 건너다 이내 물에 빠져 죽었다. 그 아내는 공후(하프와 비슷한 동양의 옛 현악기)를 타며 노래를 지어 불렀다.

 

그대여, 물을 건너지 마오 / 그대 결국 물을 건너셨도다 / 물에 빠져 돌아가시니 / 가신 임을 어이할꼬

 

노래가 끝나자 아내도 스스로 물에 몸을 던져 빠져 죽었다. 곽리자고는 집으로 돌아와 아내 여옥에게 그 광경을 이야기해 주었다. 여옥은 슬퍼하며 공후를 탄다.

 

강을 건넌 북한 여성 중에는 가난한 중국인에게 팔려간 이들도 있다. 그들은 중국에서 살다가 돈을 벌기 위해 한국으로 온다. 북한, 중국, 한국을 거쳐 서로 다른 국적을 가진 아이들의 어머니가 된다.

내가 만난 북한 여성들은 하루 품삯만 주면 휴일은 반납해도 좋았다. “휴일에는 쉬어야죠. 그러다 병나요라고 말하면, 그들은 한 푼이라도 벌어 아이들 뒷바라지를 해야지요라고 말하며 웃는다. 내 엄마가 떠올랐다. 나의 엄마도 자식에게는 따뜻한 밥을 지어주고 자신은 찬밥을 물에 말아먹었다.

엄마라는 단어에는 시린 울림이 있다. 나는 내 아이에게 어떤 엄마인지 문득 궁금해진다. 내가 만난 북한 여성들은 타임머신을 타고 내 할머니와 어머니가 살던 시대에서 온 듯했다. 자식만을 생각하는 헌신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엄마라는 가슴 저린 이름을 갖고 있었다.



글_ 강수연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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