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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손정도목사의 장남 손원일

북한종교

북한주민들은 손정도목사와 그의 아들인 손원태목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북한당국이 김일성의 청소년기 혁명활동을 통한 우상화를 위해 손정도목사를 언급하면서 그의 아들인 손원태목사에 대해 자주 언론들에 공개하면서도 손정도목사의 다른 자녀들에 대해서는 비밀에 붙이고 있다. 그런 이유로 손정도 목사의 장손이자 손원태의 형인 대한민국 초대 해군 총참모장, 제5대 국방부 장관을 하였던 손원일에 대해서 북한주민들은 모르고 있다. 

 

김일성과 손정도목사는 조선국민회를 설립하였던 장일환이 손정도목사에게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을 소개해준 것이 인연이 되어 서로 알게 되었다. 김일성이 14살 나던 1926년에 김형직이 사망하자 김일성의 모친 강반석은 김형직이 죽기 전에 손정도목사를 찾아가라는 유언대로 도움을 요청했고 손정도목사는 김일성을 자기가 도맡아 키웠다. 김일성은 그때부터 길림육문중학교에 편입하였고 손정도 목사가 목회하는 ‘길림조선인교회’에 출석하기도 하였다. 북한에서 김일성 혁명역사시간에 김일성이 청년들을 반일투쟁에 불러일으키기 위해 연예선전대 활동을 벌였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당시 교회 성가대에서 예수를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 증언자들에 의해 밝혀진 사실이다.

 

김일성은 손정도목사의 자택에서 하숙하면서 그 자녀들과 친형제처럼 지냈다. 손목사와 부인 박신일 사이에는 장남인 손원일과 차남인 손원태, 그리고 두 딸인 손인실과 손진실, 4형제가 있었다. 손목사의 장남인 손원일은 1909년 음력 5월 5일생으로 김일성보다 3살 손위였다. 김일성은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손원일보다 동생인 손원태와 더 가깝게 지냈다.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나와 손정도 목사의 유가족들은 서로 다른 길을 걸어 왔다. 현세기가 다가는 오늘까지도 가셔지지 않고 있는 분단의 비극은 우리를 철조망과 콩크리트장벽과 파도 사나운 대양으로 사정없이 갈라놓고 있다. 나는 평양에, 손인실은 서울에, 손원태는 미국에, 우리는 반세기이상이나 서로 안부조차 전하지 못하고 살아왔다.’고 고백하면서도 맏아들인 손원일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럼 왜 김일성은 생명의 은인인 손정도목사의 맏아들 손원일에 대해 언급하기를 꺼려할까? 여기에 대한 해답은 그의 애국충정과 대한민국에서 그가 이룩한 업적에 대해 북한주민들이 아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10살 나던 1919년 3월에 광성소학교 2학년에 편입하고 졸업 후 광성고등보통학교를 다닌 손원일은 상해 국립중앙대학 항해과에 입학하였다. 손원일은 1919년 소학교에 입학하여 3.1만세운동에 자기가 직접 만든 태극기를 가지고 참가하였다는 사실도 당시에 함께 참가했던 사람들의 증언으로 잘 알려져 있다. 당시 문요한목사의 집에서 수십여 개의 태극기를 만든 손원일은 시위에 참가하여 태극기가 없는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었고 군중의 맨 앞줄에 서서 ‘조선독립만세’를 목청껏 불렀다. 여기서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북한에서 중고등학교 역사시간에 배우는 3.1독립만세운동에 김일성이 만경대에서 평양시 중심 종로가로 시위를 하였다고 하면서 유화작품도 선전선동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지만 이것은 모두 거짓이다. 당시 7살이었던 김일성이 이 20여리가 넘는 시위행렬에 참가하여 시위군중의 맨 앞장에서 만세를 부르며 행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손원일이 했던 것을 북한당국이 꾸민 거짓선전이라고 본다. 당시기록에 의하면 만경대지구에서 평양으로 행진한 만세행렬은 없었고 시내 중심가에서 3.1독립만세시위가 있었다고 하니, 북한에서 김일성의 우상화를 위해 얼마나 많은 역사 사기극을 만들어 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당시의 일에 대해 손원일은 생전에 주변 친구들에게 ‘평양에서도 학생과 시민들이 대동문 앞 네거리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정오가 되자 네거리는 이미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나는 품에 감춘 태극기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만세는 늦은 밤까지 계속됐다. 만세운동은 어린 나의 마음을 후련하게 해주었다.‘고 회고하였다.

 

1921년에 손원일가족은 아버지 손정도목사를 따라 길림으로 이사하였고 그는 길림육문중학교에 입학하였으며 도중에 원광중학교로 전학하였다. 김일성은 손원일이 전학한 이후에 길림육문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김일성은 자기보다 2살 아래인 손목사의 차남인 손원태와 함께 이 학교를 다니게 되었던 것입니다.

 

북한당국은 김일성이 길림육문중학교 시절에 길림조선인소년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었다고 배워주고 있지만 사실은 이것도 역시 거짓선전이다. 길림조선인소년회를 창설하고 회장을 한 것이 손목사의 장남인 손원일이었다. 당시 길림조선인소년회의 명칭은 길림유자회(吉林幼者會)다. 손원일은 1925년 4월 30일 중국 길림성에서 길림유자회를 결성하였고 같은 해 11월 18일에는 여길학우회(旅吉學友會)를 조직하였다. 이렇듯 북한에서는 손원일의 업적을 숨기고 김일성이 조직자인 것처럼 역사를 오도하고는 손원일에 대한 언급을 피하고 있는 것이다.

손원일은 1930년 6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중국 해군부에서 해군보관 양성선발시험에서 항해지식이 우수한 5인에 당선되어 1930년 7월 21일에 상하이를 떠나 세계를 일주한 후 독일에서 약 3년간 항해에 대한 학술연구를 진행하였다. 당시 1930년 10월 10일 동아일보도 이 사실에 대해 ‘19세의 조선청년 중국에서 해군보관(補官)에 등용’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싣기도 했다.


해방이 되자 손원일은 대한민국 해군 창설에 앞장섰다. 그는 1945년 11월 11일에 서울에서 대한민국의 첫 해군병력이라고 할 수 있는 해방병단(海防兵團)을 창립하였다. 당시 해방병단이 창설된 곳은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에 있는 안동교회이다. 해방병단의 첫 명칭은 해방되고 귀국한 손원일 제독이 8월 21일 이교회에서 결성한 해사대였다. 일주일이 지난 8월 28일에 해사대를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 있는 옛 충훈부 건물로 옮기고 9월 30일에 조선해사협회로 이름을 바꾸고 본부 명칭은 '조선해사보국단 사무소'로 하였다. 그리고 그해 11월 11일 이곳에서 회원 70명과 함께 해방병단 창설실을 거행했던 것이다.

지금도 이곳에는 해방병단 결단식을 기념하여 2004년에 세운 기념비가 있다. 이 기념지에는 "조국광복과 더불어 바다에 애챡과 관심을 가진 손원일 초대해군참모총장을 비롯한 겨레의 선각자 70명이 '우리의 바다는 우리가 지킨다'는 신념과 의지로 1945년 11월 11일 이곳에서 대한민국 해군의 모체인 해방병단 결단식을 거행하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해군창설 59주년을 맞이하여 여기에 표지석을 세운다"라는 글발이 새겨져 있다. 


1948년 9월 5일 손정도의 장남인 손원일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초대 해군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고 김일성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한반도의 공산화 야욕을 실현하기 위해 무분별한 동족상잔의 6·25남침전쟁을 일으키자 전쟁에 참전하였다. 1950년 8월 23일, 통영 상륙작전을 취재하러 왔던 미국 뉴욕타임스의 한 종군기자는 소련제 무기로 무장한 북한군을 반격하여 물리친 대한민국 해병대의 전투성과에 대해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결국 김일성은 생명의 은인인 손정도 목사의 집에서 한 솥밥을 먹었던 손원일 장군과 전장에서 적으로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해방병단을 창설하고 ‘군인은 충무공 이순신 정신에 살고 충무공 정신에 죽자’는 구호를 내걸고 해병대를 이끌었던 손원일은 전쟁 후에 대한민국 국방장관을 역임하였다. 손원일의 부인인 홍은혜여사는 대한민국 최초의 군가인 ‘바다로 가자’를 작곡하였고 일생동안손원일 제독의 애국활동을 도왔다.

 

이렇듯 김일성이 생명의 은인이라고 치켜세운 손정도목사의 맏아들인 손원일 장군은 일생을 반공일선에서 대한민국을 수호하여 용감하게 싸운 위인인 것으로 하여 북한당국에서는 일절 언급을 피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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