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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일성의 `생명의 은인` 손정도목사

북한 종교

김일성이 기독교를 접하고 신앙생활을 하게 된 계기는 손정도 목사의 영향이 대단히 컸다는 사실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김일성의 회고록 제2권 4장 1절 제목이 ‘손정도 목사’이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손정도 목사의 도움으로 1929년 가을에 일제경찰에 의해 길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1930년에 출옥할 수 있었다며 그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였다. 

회고록에서 김일성은 당시 일제경찰에 체포되었다고 진술했으나 사실은 중국 경찰에 의해 감옥생활을 했다는 것이 수백여 명의 증언자들을 인터뷰하여 김일성평전을 서술한 유순호 작가의 주장이다. 남만주청년총연합, 북한에서는 남만청총이라고 부르던 조직의 간부였던 이종락의 지시로 당시 17살이던 김일성이 소련공산당을 지지하는 삐라를 뿌리며 다니다가 체포되었다고 김일성을 취급하였던 중국인 경찰 축옥성이 증언하였던 것이다.

김일성이 자기를 길림감옥에서 구출한 생명의 은인이라고 한 손정도 목사는 1882년 7월 26일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 오흥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902년 과거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평양으로 가다가 날이 저물어 한 가정에 투숙하게 되었는데 바로 그 집이 조씨 성을 가진 목사가 사는 집이었다. 손정도 목사는 당시까지만 해도 가정의 전통대로 유교에 심취되어 있었던 30살의 청년이었다. 그가 상투를 올렸던 머리를 자르고 신학문과 서구문화에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조 목사의 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후 손정도 목사는 집으로 돌아와 집안 대대로 유교를 믿으며 방에 모셔왔던 사당을 부수어 버렸다. 이것이 그가 유교에서 기독교로 종교를 바꾼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에 손정도 목사는 평양주재 미국감리교회 선교사였던 문요한의 비서 겸 한국어선생으로 일하면서 숭실중학교에서 신학문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손정도 목사는 1905년에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여 1908년에 본 학교를 졸업하였다. 김형직은 1911년에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장가도 가고 강반석이 김일성을 낳은 데 이어 둘째 아들인 김철주를 임신하자 1913년에 중퇴를 하고 생계를 위해 순화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김형직보다 12살이나 나이가 위인 손정도 목사가 숭실중학교 6년 선배인 셈이다.

손정도 목사의 부인인 박신일은 남편의 학비를 마련하고 두 딸인 손진실과 손성실을 양육하기 위해 평양기독병원에서 일하였다.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손정도 목사는 1909년에서 기독교 감리교회에서 운영하는 신학대학인 협성신학당을 졸업하고 평양 남산현교회와 진남포교회를 맡아 목회하였다. 

남산현교회는 미국 의료선교사인 더블유 제이 홀 선교사에 의해 1893년 4월에 평양에 세워진 교회다. 홀 선교사는 1894년 2월 평양에서 서울 배재학당 졸업생인 노병선을 통역원으로 근무하도록 하면서 교육을 시작하였고 이것이 광성학교로 발전하였다. 초창기에 8명에 불과하였던 학생수가 점차 증가하여 1896년에는 30명, 그 중 21명이 세례를 받기도 하였다. 그 후 교인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1898년에는 473명, 그리고 5년이 지난 1903년에는 1,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새 예배당을 건설할 정도로 교회가 커졌다. 남산현교회는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에 장로교의 장대현교회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기독교의 선교중심으로 부각되었고, 이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남산현교회의 교인 수는 3천명을 넘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손정도 목사는 남산현교회에서 목회를 하였던 것이다.

남산현교회는 1919년 3·1운동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이 교회 신홍식 담임목사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고 박석훈 부목사는 3월 1일 8백여 명의 교인들과 함께 교회에서 고종황제 봉도식과 독립선언식을 갖고 만세시위를 지휘하다가 체포되어 11월 15일 고문으로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손정도 목사의 맏딸인 손진실도 남산현교회 신도였던 김세지, 박승일, 오신도, 박현숙 등과 함께 1919년 11월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중국 상해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가들을 돕다가 1920년 10월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하였다.

일제의 침략으로 많은 사람들이 만주로 이동하면서 기독교에서는 중국 만주지역에 있는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선교사를 파견했다. 손정도 목사는 미국 감리교의 선교사 파송목적으로 1910년 5월 중국에 파송되었으며 베이징과 만주의 안동, 길림 등 간도지방을 담당한 순회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손 목사는 그 당시에 중국 베이징에서 신민회 핵심이었던 안창호 선생을 알게 되었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이후 3년간 상해에서 손정도 목사는 임시 의정원 의장을 맡아 독립군 무기기금 모금운동을 벌렸고 박은식과 함께 대한교육회를 조직하였으며 대한적십자회 상임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 다음해인 1920년에는 안창호 선생과 함께 흥사단 극동임시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1921년에 길림에서 농민합작사를 설립하여 독립운동 투쟁기반과 민족대동단결에 총력을 기울였다. 손정도 목사는 중국 만주지방에서 선교활동과 독립운동을 벌이기 위해 중국어공부도 열심히 하여 중국인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길림에 한인교회를 개척하였다.

손 목사의 인간사랑은 동포들을 신앙으로 위로 하고 억울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로 이어졌으며 그 과정에 김일성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뛰어난 웅변술과 준수한 용모, 진심이 담김 언행으로 손정도 목사는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며 민족의 독립과 해방이 복음선교의 일부라는 선교관에 따라 이르는 곳마다에서 애국심을 불러일으켰다. 일제는 애국심이 강하고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손정도 목사를 요시찰 인물로 지목하고 감시를 강화했다.

1910년 12월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 사건으로 손 목사는 ‘105인 사건공모자’로 체포되었다. 1년의 감옥살이를 마치고 추방되어 전라남도에 유배형을 강요당했고 그 이후에 서울에 있는 정동교회 6대 담임목사로 부임되었다. 당시 정동교회의 목회대상자는 주로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학생들이었다. 이는 청년들이 많이 출석하는 교회로서 손정도 목사의 교회활동이 청년운동과 연계되는 계기가 되었다. 김일성은 자기의 자서전인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자신이 기독교인으로부터 인간적인 도움을 받았다”고 하였다. 회고록에 의하면 손정도 목사는 길림에 온 후 일본경찰들이 ‘제3세력’이라고 규정한 혁신파 인물들과 연계를 가지고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새 세대의 청년들과도 잘 어울렸고 젊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성의를 다하여 후원해주었다고 한다. 김일성은 이에 대해 손정도 목사가 운영하는 교회당에 자주 찾아가 풍금도 타고 연예선전대의 활동도 지도하였다며 “손정도 목사가 우리가 요구하는 것이면 무엇이건 다 해결해주고 우리의 혁명활동을 충심으로부터 지지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그를 친아버지처럼 따르고 존경하였다”고 강조했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와 북한의 언론매체들에서 다루는 손정도 목사는 단순히 김일성의 아버지인 김형직의 친구라는 사실과 그의 도움으로 김일성이 길림감옥에서 출옥되었다는 것만 간단히 언급하지만 역사적인 사실자료들에는 그의 애국심과 영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 수 있다.

그가 민족해방운동에 쌓은 업적은 해방 전에 일제의 토벌을 피해 러시아의 붉은 군대 산하 조선인으로 조직된 극동군 88저격여단에서 소련공산당을 위해 싸웠던 김일성과는 비교할 수 없다.  북한정권이 손정도 목사의 업적과 위대한 천품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역사적인 사실을 김일성을 중심으로 끼워 맞춰 거짓역사교육을 하고 있지만 진실은 감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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