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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일성의 부모 중매인 미국선교사 넬슨 벨

김일성이 다닌 교회는 송산교회당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이 미국 선교사였던 넬슨 벨의 중매로 결혼하여 김일성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과 강신희였던 김일성의 어머니의 이름이 강반석으로 된 것은 교회에서 세레를 받으면서 미국인 목사가 지어준 이름이었다는 사실은 비밀이 아니다.


'혁명적 집안'이 아닌 기독교집안에서 태어난 김일성

북한에서 초중고등학교 '김일성 혁명역사'과목을  배워주면서 김일성은 혁명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김일성이 어린시절에 교회에 다닌 사실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김일성이 어린 시절에 만경대에서 다니던 교회는 지금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이 위치한 곳에 있었던 송산교회당이었다. 김일성도 자기의 회고록 1권에서 당시 송산교회 김성호 담임목사에 대해 회고하였다. 그리고 송산교회에 다닐 때 교회에서 주는 사탕과 공책을 받았던 일들도 기억하고 있다고 증언하였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일이 정 고달플 때면 어머니는 삼촌어머니와 함께 예배당으로 가곤하였다. 송산이라면 지금의 군사대학이 있는 곳 인데 거기에 장로교계통의 예배당이 하나 있었다. 남리와 그 주변에는 기독교를 믿는 신자들이 적지 않았다. 살아서 사람다운 생활을 못하니 예수의 가르침을 잘 따르다가 죽어서 천당에라도 가보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다’라고 기록하였다.


재미교포 역사학자인 오순호가 쓴 ‘김일성 평전’에는 “강반석은 결혼 전 아버지 강돈욱의 영향으로 기독교인이 되었고, 결혼 뒤에는 독립운동에 나선 김형직의 아내가 되어 남편을 섬겼다. 그는 다른 여성들처럼 재봉도 하고 달구지도 끌고 다니면서도 언제나 한 손에는 성경책을 들고 기도를 드리는 일을 잊지 않았다”고 서술되어 있다.

 

김형직과 강반석의 결혼생활은 김일성이 7살 되던 1918년부터 자강도 중강(당시는 평안북도 중강진)을 거쳐 중국 임강, 팔도구 등으로 옮겨가면서 이어졌다. 강반석은 팔도구에 살면서도 압록강 건너의 양강도 후창군 읍에 있는 포평교회당에 김일성을 데리고 예배하러 다녔다.


조선국민회 창립자는 김형직이 아닌 장일환

김일성 일가가 만경대에서 살지 못하고 쫓겨 다니듯 타향살이를 한데는 김형직이 형처럼 따르던 장일환이라는 사람이 큰 영향을 미쳤다. 김일성의 회고록을 보면 장일환이라는 이름이 언뜻 나옵니다. 김형직이 조선국민회를 설립할 때 함께 한 동지라고 소개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김형직이 조직자이고 그는 김형직의 부하인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장일환이 조선국민회를 조직하였고 김형직은 그의 심복이었다. 김형직보다 8살이나 연상인데다가 숭실중학교 선배였던 장일환은 1913년에 안창호선생의 도움으로 평양에 청산학교를 설립하고 1917년 3월 23일에 강석봉, 서광조, 배민수, 백세빈, 이보식, 김형직 등 25명을 규합해 항일기독단체인 조선국민회를 결성하고 회장이 되었다. 김형직을 손정도목사에게 소개해 준 사람도 장일환이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조선국민회는 미국선교사들이 세운 숭실중학교 졸업생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기독교단체였고 설립자는 장일환이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장일환은 1918년 2월에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4월 9일에 고문으로 순국하였다. 당시 가장 나이가 어렸던 김형직은 감옥에서 인차 석방되었고 장일환이 사망되었다는 소식에 놀라서 또다시 체포되는 것이 두려워 중강진으로 가족을 데리고 피신했다. 장일환이 순국하기 전에 감옥에서 조선국민회 회원이었던 배민수에게 “나는 곧 죽게 될 거야. 주님의 곁에서 항상 널 위해 기도해 줄게. 값지게 죽는 것이 뜻 없이 사는 것보다 가치가 있을 거야. 네가 목숨을 잃지 않고도 자유를 찾을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하마”라는 말을 남겼다.

 

김일성과 북한당국이 손정도 목사에 대해 숨기지 않으면서도 손정도 목사를 김형직에게 소개하였던 조선국민회 창시자인 장일환에 대해 숨기는 이유는 지금까지 조선국민회를 김형직이 설립했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이 드러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김형직은 중강진에 피신하였을 때에는 오동진의 도움을 받았다. 김일성은 자기의 회고록에 “오동진이 처음에는 마음씨 좋은 상인 아저씨로 알고 있었는데 훗날 무송에 가서야 그가 대단한 독립운동가라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아버지 김형직에 대한 오동진의 우애는 지극하였고 김일성의 집으로 찾아오는 독립운동가들의 식사를 오동진의 부인이 직접 할 정도로 매우 가까운 동지로 묘사했다. 김일성은 자신이 오동진을 이처럼 상세하게 소개하는 것은 김형직이 의원을 차리는데 필요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졸업증을 오동진이 돈을 주고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북한전문가들의 주장이다. 그리고 김형직이 의술을 자습하도록 ‘의종 금감’이라는 의학도서도 주었고 부족한 자금도 도와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는 1885년 미국 선교의사 알렌이 서울에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이듬해 16명의 학생으로 우리나라에 처음 세워진 의학전문학교로, 1957년에 연희대학교와 통합하여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으로 발전하였다. 김일성도 회고록에서 “아버지는 방 한 칸을 내여 약방 겸 치료실로 꾸리고 바깥벽에 《순천의원》이라는 간판을 큼직하게 달아놓았다. 방안에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졸업증도 하나 걸어놓았다. 아마 평양을 떠나기 전에 어느 친구에게 부탁하여 얻은 졸업증이라고 생각된다”고 고백하였다.

 

아편장사꾼 김형직

김일성의 어머니인 강반석에게는 강진석, 강용석, 강창석 3명의 오빠가 있었다. 이 3명의 외삼촌 중에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큰 외삼촌인 강진석만 소개되고 있다. 회고록에는 그가 백산무사단원으로 군자금을 모금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감옥생활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더 구체적인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김일성평전에는 강진석이 군자금을 마련한다며 부자들의 집을 습격하여 생긴 아편을 중강진에 살고 있던 매부인 김형직에게 주고 갔고 김형직은 그때부터 아편장사를 시작했다는 것이 당시 그곳에서 살고 있었던 사람들에 의해 밝혀졌다. 1919년 4월 독립군 대한독립단의 한 성원이었던 강진석은 만주에서 국내로 들어와 한 친일부자의 집을 습격하였는데 그때 그는 큰 덩어리의 아편을 손에 넣었고 그것을 김형직에게 주었다. 김형직은 아편을 판 돈을 강진석에게 일부는 보내고 '순천의원'을 열어 아편으로 치료도 하고 팔기도 하였다. 


김일성의 외삼촌인 강진석이 1921년 4월에 평양에서 체포된 후 아편문제가 드러날 위험을 느끼고 중강진에서 장백현 팔도구로 이사를 한 김형직은 이곳에서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졸업장을 내걸고 의원으로 정체를 숨겼다. 중강진에서는 교회에 다닐 수 없었던 강반석은 팔도구에 와서야 어느 정도 안착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당시 중국에는 일제의 영향이 덜 미쳤고 주변에 누구도 모르는 지역이다 보니 정체를 숨길 수 있었다. 신약이 부족했던 당시 의원들은 거의 동약으로 환자들을 치료했고 호흡기질병과 소화기질병 등 각종 질병에 아편이 만병통치약처럼 쓰였다.


김형직의 친구인 오동진이 창설한 '광제청년단' 단원들도 군자금을 마련한다며 부자집들을 털러다녔는데 순천의원은 그 아지트였다. 그들도 노획품 중에 아편은 김형직에게 주었다. 김일성의 외삼촌 강진석은 친구 신환고 함께 평북도 자성군 열연면 건하동형직과 어머니 강반석이 미국 선교사였던 넬슨 벨의 중매로 결혼하여 김일성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과 강신희였던 김일성의 어머니의 이름이 강반석으로 된 것은 교회에서 세레를 받으면서 미국인 목사가 지어준 이름이었다는 사실은 비밀이 아니다.


'혁명적 집안'이 아닌 기독교집안에서 태어난 김일성


북한에서 초중고등학교 '김일성 혁명역사'과목을 배워주면서 김일성은 혁명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김일성이 어린시절에 교회에 다닌 사실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김일성이 어린 시절에 만경대에서 다니던 교회는 지금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이 위치한 곳에 있었던 송산교회당이었다. 김일성도 자기의 회고록 1권에서 당시 송산교회 김성호 담임목사에 대해 회고하였다. 그리고 송산교회에 다닐 때 교회에서 주는 사탕과 공책을 받았던 일들도 기억하고 있다고 증언하였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일이 정 고달플 때면 어머니는 삼촌어머니와 함께 예배당으로 가곤하였다. 송산이라면 지금의 군사대학이 있는 곳 인데 거기에 장로교계통의 예배당이 하나 있었다. 남리와 그 주변에는 기독교를 믿는 신자들이 적지 않았다. 살아서 사람다운 생활을 못하니 예수의 가르침을 잘 따르다가 죽어서 천당에라도 가보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다’라고 기록하였다.


재미교포 역사학자인 오순호가 쓴 ‘김일성 평전’에는 “강반석은 결혼 전 아버지 강돈욱의 영향으로 기독교인이 되었고, 결혼 뒤에는 독립운동에 나선 김형직의 아내가 되어 남편을 섬겼다. 그는 다른 여성들처럼 재봉도 하고 달구지도 끌고 다니면서도 언제나 한 손에는 성경책을 들고 기도를 드리는 일을 잊지 않았다”고 서술되어 있다.


김형직과 강반석의 결혼생활은 김일성이 7살 되던 1918년부터 자강도 중강(당시는 평안북도 중강진)을 거쳐 중국 임강, 팔도구 등으로 옮겨가면서 이어졌다. 강반석은 팔도구에 살면서도 압록강 건너의 양강도 후창군 읍에 있는 포평교회당에 김일성을 데리고 예배하러 다녔다.


조선국민회 창립자는 김형직이 아닌 장일환


김일성 일가가 만경대에서 살지 못하고 쫓겨 다니듯 타향살이를 한데는 김형직이 형처럼 따르던 장일환이라는 사람이 큰 영향을 미쳤다. 김일성의 회고록을 보면 장일환이라는 이름이 언뜻 나옵니다. 김형직이 조선국민회를 설립할 때 함께 한 동지라고 소개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김형직이 조직자이고 그는 김형직의 부하인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장일환이 조선국민회를 조직하였고 김형직은 그의 심복이었다. 김형직보다 8살이나 연상인데다가 숭실중학교 선배였던 장일환은 1913년에 안창호선생의 도움으로 평양에 청산학교를 설립하고 1917년 3월 23일에 강석봉, 서광조, 배민수, 백세빈, 이보식, 김형직 등 25명을 규합해 항일기독단체인 조선국민회를 결성하고 회장이 되었다. 김형직을 손정도목사에게 소개해 준 사람도 장일환이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조선국민회는 미국선교사들이 세운 숭실중학교 졸업생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기독교단체였고 설립자는 장일환이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장일환은 1918년 2월에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4월 9일에 고문으로 순국하였다. 당시 가장 나이가 어렸던 김형직은 감옥에서 인차 석방되었고 장일환이 사망되었다는 소식에 놀라서 또다시 체포되는 것이 두려워 중강진으로 가족을 데리고 피신했다. 장일환이 순국하기 전에 감옥에서 조선국민회 회원이었던 배민수에게 “나는 곧 죽게 될 거야. 주님의 곁에서 항상 널 위해 기도해 줄게. 값지게 죽는 것이 뜻 없이 사는 것보다 가치가 있을 거야. 네가 목숨을 잃지 않고도 자유를 찾을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하마”라는 말을 남겼다.


김일성과 북한당국이 손정도 목사에 대해 숨기지 않으면서도 손정도 목사를 김형직에게 소개하였던 조선국민회 창시자인 장일환에 대해 숨기는 이유는 지금까지 조선국민회를 김형직이 설립했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이 드러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김형직은 중강진에 피신하였을 때에는 오동진의 도움을 받았다. 김일성은 자기의 회고록에 “오동진이 처음에는 마음씨 좋은 상인 아저씨로 알고 있었는데 훗날 무송에 가서야 그가 대단한 독립운동가라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아버지 김형직에 대한 오동진의 우애는 지극하였고 김일성의 집으로 찾아오는 독립운동가들의 식사를 오동진의 부인이 직접 할 정도로 매우 가까운 동지로 묘사했다. 김일성은 자신이 오동진을 이처럼 상세하게 소개하는 것은 김형직이 의원을 차리는데 필요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졸업증을 오동진이 돈을 주고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북한전문가들의 주장이다. 그리고 김형직이 의술을 자습하도록 ‘의종 금감’이라는 의학도서도 주었고 부족한 자금도 도와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는 1885년 미국 선교의사 알렌이 서울에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이듬해 16명의 학생으로 우리나라에 처음 세워진 의학전문학교로, 1957년에 연희대학교와 통합하여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으로 발전하였다. 김일성도 회고록에서 “아버지는 방 한 칸을 내여 약방 겸 치료실로 꾸리고 바깥벽에 《순천의원》이라는 간판을 큼직하게 달아놓았다. 방안에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졸업증도 하나 걸어놓았다. 아마 평양을 떠나기 전에 어느 친구에게 부탁하여 얻은 졸업증이라고 생각된다”고 고백하였다.


아편장사꾼 김형직


김일성의 어머니인 강반석에게는 강진석, 강용석, 강창석 3명의 오빠가 있었다. 이 3명의 외삼촌 중에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큰 외삼촌인 강진석만 소개되고 있다. 회고록에는 그가 백산무사단원으로 군자금을 모금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감옥생활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더 구체적인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김일성평전에는 강진석이 군자금을 마련한다며 부자들의 집을 습격하여 생긴 아편을 중강진에 살고 있던 매부인 김형직에게 주고 갔고 김형직은 그때부터 아편장사를 시작했다는 것이 당시 그곳에서 살고 있었던 사람들에 의해 밝혀졌다. 1919년 4월 독립군 대한독립단의 한 성원이었던 강진석은 만주에서 국내로 들어와 한 친일부자의 집을 습격하였는데 그때 그는 큰 덩어리의 아편을 손에 넣었고 그것을 김형직에게 주었다. 김일성의 외삼촌 강진석은 친구 신환과 함께 평북도 자성군 열연면 건하동에서 사는 부자 양기조의 집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김형직의 친구인 오동진이 창설한 '광제청년단' 단원들도 군자금을 마련한다며 부자집들을 털러다녔는데 순천의원은 그 아지트였다. 그들도 노획품 중에 아편은 김형직에게 주었다. 김형직은 아편을 판 돈을 강진석에게 일부는 보내고 '순천의원'을 열어 아편으로 치료도 하고 팔기도 하였다. 신약이 부족했던 당시 의원들은 거의 동약으로 환자들을 치료했고 호흡기질병과 소화기질병 등 각종 질병에 아편이 만병통치약처럼 쓰였다.


김일성의 외삼촌인 강진석이 1921년 4월에 평양에서 체포된 후 아편문제가 드러날 위험을 느끼고 중강진에서 장백현 팔도구로 이사를 한 김형직은 이곳에서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졸업장을 내걸고 의원으로 정체를 숨겼다. 중강진에서는 교회에 다닐 수 없었던 강반석은 팔도구에 와서야 어느 정도 안착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당시 중국에는 일제의 영향이 덜 미쳤고 주변에 누구도 모르는 지역이다 보니 정체를 숨길 수 있었다. 


강반석은 김일성을 데리고 자주 압록강을 건너 포평교회당에 다녔다. 북한에서 혁명역사시간에 강반석이 팔도구에서 포평으로 자주 김형직의 공작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드나들었다고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런데 사실은 교회를 다니거나 아편장사를 도와 압록강을 넘나들었다는 것이 당시 증인들의 진술을 근거로 한 북한전문가들의 주장이다.

북한에는 강반석이 압록강을 넘나들 때 감시원들에게서 짐수색을 당하는 미술작품이 있다. 북한당국이 강반석이 김형직의 혁명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연락쪽지를 나르던 장면을 형상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의원을 차린 김형직에게 사람들의 왕래는 자연스러운 것이기에 이렇게 몰래 쪽지를 날라다 줄 필요는 없었다.

 

김형직은 오동진의 도움으로 중강진에 이어 팔도구에도 의원을 차릴 수 있었고 강진석이 가져다 준 아편을 팔면서 돈을 벌기 시작하여 큰돈을 모을 수 있었다. 1925년 당시 조사된 일본 관헌의 기록에는 김형직의 자산이 천원으로 기재되어있다. 당시로는 여러 채의 집을 살 수 있는 거액이었다.


만경대에서 살 때보다 교회에 다니는 회수가 줄어들었고 김형직도 점차 교회에 잘 출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형직이 장일환으로부터 소개받았던 손정도 목사와 왕래하면서 훗날 김일성은 기독교 학교인 화성의숙에 입학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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