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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는 일본군에 복무한 친일파였다.

북한의 친일파 숙청은?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는 일본군에 복무한 친일파였다.

 

김일성의 막내동생 김영주(金英柱, 1920년생)는 일제강점기시대에 일본군 통역관을 하였던 인물이다. 1920년 만주에서 김형직과 강반석의 3남 중 막내로 태어난 김영주는 6살 나던 1926년에 부친 김형직을, 12살 나던 1932년에는 모친 강반석을 잃고 고아가 되었다. 당시 맏형이었던 김성주(김일성의 본명)는 중국공산당에 입당한다며 집을 떠나 생활하였고 둘째형인 김철주도 20살 나이에 죽자 김영주는 고아신세가 되어 만주의 각지를 떠돌아다녔다.

유랑살이를 하던 김영주는 장춘에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에 취직하면서 일본말을 배우게 되었다. 이명영(1928~2000)은 신문화사 잡지에 ‘김일성열전-그 전설과 신화의 진상규명을 위한 연구’에서 당시 김영주에 대해 ‘일본인 상점에 취직하여 일하고 있던 김영주는 술도 잘 먹고 노래도 잘 부르며 싸움도 잘하는 건달 같은 청년이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일본인 가게에서 일하다가 한국어와 일본말을 잘하는 것으로 하여 일본군 통역관으로 활동하하게 되었고 해방전까지 일본군으로 복무하였다.

 

일본군에서 김영주의 이름은 김일선(金日鮮)


김영주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이후에도 중국 호남성(湖南省) 상담현(湘潭縣)의 일본군 부대에서 통역관으로 근무하였다. 중국말도 잘 했던 그는 9월 15일에 중국 국민당 군대가 일본군 부대의 항복을 받을 때 통역을 맡기도 했다. 그 후 중국군에서 통역관으로 복무하다가 부대에서 사귄 한국출신의 이용상(李容相,1924∼2005)씨와 함께 1946년 4월 30일에 상해에서 배로 부산항에 입항하였고 5월 4일 밤에 서울역에 도착하였다. 서울에서 이용상의 집에서 이틀간 머물고 김영주는 5월 6일에 북한에 가려고 서울을 출발하였다. 이용상씨는 김영주가 중국에 있을 때 평양방송을 듣고 북한의 지도자로 된 김일성이 자기의 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용상씨는 당시 김영주의 고민거리에 대해 형인 김일성이 자기가 ‘일본군에서 통역을 한 사실을 알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걱정을 하였다’고 한다.

이용상씨는 1945년 9월 15일부터 1946년 5월 6일까지 한국출신으로 중국군에서 김영주와 함께 숙식하면서 겪었던 기억을 살려 1991년에 중앙일보에 ‘나의 친구 김영주’라는 제목의 기사를 50여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그리고 이 기사들을 종합하여 1994년에는 ‘삼색의 군복’이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이 기사들을 보면 김영주가 일본군에서 김일선(金日鮮)으로 개명한 이유를 잘 알 수 있다. 이용상씨는 김영주에게 ‘누가 김동지의 이름을 김일선으로 개명해주었느냐’고 질문하였는데 김영주는 자기가 스스로 지은 이름이라며 ‘왜「일선」이라고 지은 지 압니까? 일본놈들이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속임수로 떠들던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본떠서 지은겁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그는 일본군에 복무하면서 김일선으로 개명한 덕을 톡톡히 봤다며 일본군경에게도 ‘자 보시오. 나는 내 이름까지도 내선일체라는 뜻에서 일선이라고 지었지 않느냐’고 하군 했다는 것이다.

 

김영주의 평양입성


평양시 중구역의 봉화역(지하전철역) 인근의 당창건사적관은 광복 후 김일성이 집무실로 이용하던 곳이다. 1923년에 조선총독부는 평양의 대동강에 대동교를 건설하면서 인근에 평안남도 상품진열소를 건설하도록 하였는데 이 건물이 지금의 당창건사적관이다. 김일성은 식모로 고바야시 카즈코(小林和子)라는 일본인 여성을 두었는데 그 여성은 일본에 돌아와 1970년에 ‘나는 김일성 수상의 하녀였다 (私は金日成首相の小間使いだった)’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하였다. 이 책을 보면 1946년 5월에 김일성의 저택에 들어와 살았던 동생 김영주는 일본말을 너무도 잘하여 일본사람으로 착각했다는 내용이 있다. 어느 하루는 고바야시의 언니가 평양의 불량청년들에게 매 맞는 일이 발생했는데 김영주는 권총과 몽둥이를 들고 보안대원 여러 명을 이끌고 그 청년들을 찾아내 실컷 두들겨 패주고 감옥에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아마 그 청년들은 반일감정으로 일본인 여성인 고바야시의 언니를 폭행했지만 일본군 복무경력이 있는 친일성향이 있었던 김영주는 그를 보호해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김영주가 일본군에서 복무한 사실은 일제강점기에 김일성과 소련극동군 88저격여단에서 함께 소련군으로 복무하였던 유성철의 증언으로 그 진실이 더 드러났다. 6.25남침전쟁시기 인민군 작전국장을 지내기도 했던 유성철은 김영주가 일본군으로 복무하였고 광복 후 상해를 거쳐 평양에 돌아왔다고 증언하였다.

형인 김일성은 김영주의 일본군 복무경력을 알면서도 그가 항일빨치산활동에도 참여했다는 선전물이 나가도록 하였고 모스크바종합대학(정치경제학부)에 유학을 보냈다.

 

친일파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부장으로


김영주가 6.25남침전쟁기간에 소련에서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오자 김일성은 그를 당중앙 조직부 지도원으로 배치해주었다. 1954년에 중앙당 조직부 지도원으로 시작한 당간부 생활은 형인 김일성의 배경을 힘입어 승승장구하였다. 1957년에는 중앙당 조직부 부부장, 1960년 9월에는 조직지도부 부장으로 승진하였으며 1972년 12월에는 남북조절위원회 북측위원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66년에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후보위원, 1969년 12월에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여 북한의 최고 핵심권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1970년대 김정일이 후계자로 등장하면서 김영주는 김정일에게 밀려나 행정간부로 근무하였다. 1974년 2월에 정무원 부총리로, 1993년 12월에 내각 부주석, 2014년 4월에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북한에서 친일파숙청, 과연 제대로 한 것인가?


김영주의 친일행적을 빨치산 출신 투사들은 물론 소련파와 연안파, 갑산파의 고위층 간부들도 다 알고 있었다. 이것을 의식한 김일성은 ‘돈있는 사람은 돈으로, 능력있는 사람은 능력으로, 힘있는 사람은 힘으로!’라는 구호를 내세우면서 북한의 당과 국가 요직에 많은 친일성향의 인사들을 등용하였다.

일본군 출신의 김영주에 이어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였던 장헌근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사법부장, 일제시기 일본인이 경영하는 광산지배인이었던 정준택은 북조선인민위원회 산업국장, 조선총독부 평안도의원이었던 김일성의 외가 친척인 강양욱은 북조선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함흥철도 국장이었던 한희진은 북조선인민위원회 교통국장 등 요직에 들어앉혔다.

언론계도 마찬가지였는데 일제강점기 만선일보 편집부장이었던 박팔양은 노동신문 편집부장, 아사히서울지국 기자였던 정국은은 북한의 문화선전성 부부장으로 근무하였고 일본 나고야 항공학교 출신인 이활과 허민국, 강치우는 인민군 공군사령관과 인민군 9사단장, 인민군 기술부사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곁가지 김영주


김정일의 후계세습은 삼촌인 김영주를 일당독재인 노동당 지도부에서 제거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형인 김일성의 덕택으로 모스크바 유학도 하였고 노동당 핵심권력을 차지하면서 승승장구하던 김영주는 후계경쟁에서 김정일에게 밀려 1976년 5월 이후에는 북한의 언론매체들에서 사라졌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자강도에 쫓겨나갔고 김일성종합대학에 다니던 딸 김영성과 아들 김정현도 퇴학되어 함께 내려갔다. 김일성이 죽기 1년전인 1993년에 김정일을 설득하여 다시 평양으로 올라오면서 18년간의 유배생활은 끝났다. 그 이후 그는 ‘명예 국가부주석’이라는 자리에 앉혀졌지만 아무런 실권도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현재 대한민국의 위기는 북한으로부터 몰아오고 있다. 연이은 북한의 미사일도발에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는 사이비정치인들과 일부 선동된 국민들은 안보경제동맹국인 일본에 대해 난리를 치고 있다. 부친이 일제시기 흥남시청에서 계장을 했던 문재인이 앞장서서 반일선동으로 선거공략을 펼치고 있다. 나라가 어찌되더라도 재집권만 성사하면 그만이라는 심보다. 경제력이 우리의 2%도 안되는 북한과 평화경제를 한다며 호들갑을 떨어도 김정은은 문재인을 위협하는 미사일이 맛이 어떠냐고 조소하며 우쭐거린다.

정치인들과 시민단체들은 친일파니, 반일이니, 불매운동이니, 위안부니 하는 따위의 선동표구로 국민을 선동할 것이 아니라 북한의 안보위협을 막기 위한 한미일 군사동맹강화에 최선을 다할 때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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