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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희대의 플라잉 번트로 대한민국 야구를 세계정상으로 이끈 ‘그라운드의 여우’ 김재박

- 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대구에서 서울로 다시 대구로 이어진 학생야구 시절
- 영남대학교에서 꽃 핀 야구 인생... 그리고 희대의 플라잉 희생번트
- 선수로 날린 명성(名聲)에 이어, 크게 성공한 야구 지도자

17세기가 낳은 최고의 작가로 평가되는 발타자르 그라시안은 이런 말을 했다.


사랑했던 시절의 따스한 추억과 뜨거운 그리움은 신비한 사랑의 힘에 의해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게 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과거의 소중함과 그 시대에 뜨거웠던 열정을 무시한 채 오로지 현재에서 티격태격 한다. 그러나 과거 없는 오늘이 없고, 원인 없는 결과가 없듯이 2019년 뜨거운 다이아몬드 그라운드를 일찍이 불 지핀 이들이 있었으니, 지금부터 그들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올드 야구팬들이 모이면 엄마 배 속에서부터 야구를 배워 가지고 나온 선수들이 있다. 앞으로도 있을까 싶은 걸출한 선수들이 바로 장효조·김재박·배대웅·김일권이다는 얘기를 종종 한다.


당대의 최고 투수였던 남우식황규봉·최동원·선동열 등이 인구에 회자되지만, 야수선수들 중에서 엄마 배속에서 야구를 배워 왔다고 할 정도로 천부적 소질을 가졌다고 평가받는 대표적인 선수들을 뽑으라고 한다면, 단연 이들 4명에 다들 동의할 것이다. 적어도 스스로 올드 야구팬, 또는 한국 야구의 역사를 좀 안다고 자부한다면...... .




 

장효조에 이어, 이번에는 그라운드의 여우김재박의 스토리다.

 

김재박은 1954523일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났다. 대구 대신동에 살았던 그는 대구국민학교를 다녔다. 당시 집 근처에 야구 명문 경북고등학교(. 대구 황금동 소재)가 있어서 오다가다 경북고 선수들이 연습하는 걸 보고 미래를 꿈 꿨다고 한다.

 

경북고 선수들이 야구하는 모습이 하도 멋있어 11살인 대구국민학교 5학년에 처음 야구글러브를 끼고 배트를 휘둘렀다고 한다. 키도 작고 체격도 왜소한 편이었지만수는 당시 감독 선생님께서 많이 배려해 주어서 포수에 5번 타자를 했다.

 

특기생으로 경북중학교에 진학했는데 동기 중에는 훗날 명성을 날리면서 대구·경북을 연고로 하는 삼성라이온즈에서 주축이 된 이선희·함학수·구영석 선수 등이 있었다.




 

김재박은 중학교 시절에도 체격이 별로 크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수비와 배팅을 꾸준히 연마했으며, 당시 경북중학교 박창용 감독이 2루수, 2번 타자로 고정을 시켜준 덕분에 주전으로 뛸 수 있었다고 한다. 중학교 3년 동안 소속팀은 전국 대회에 3번 나가서 3위인가 4위를 한번 했을 정도로 특별한 성적을 내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꿈에도 그리던 경북고등학교 야구부에 지원을 했으나, 당시 경북고 서영무 감독(초대 삼성라이온즈 감독)으로부터 , 니는 힘도 약하고 실력도 모지랜데이. 다른 학교 알아 보거라며 일언지하에 퇴짜를 맞았다. 그렇게 진학할 학교가 마땅치가 않았다고 한다.

 

김재박은 당시를 기억하며 어느 인터뷰에서 어떡합니까? 선생님이 넌 실력이 부족해서 안 된다는 걸요. 실망스럽기도 하고 솔직히 창피하기도 하고 그렇더라구요. 한데 그때 집이 서울 종암동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서울로 거처를 옮겼는데 마침 종암동 인근의 신설동에 있는 대광고(81년 해체)가 야구팀을 창단했지 뭡니까 그래서 대광고에 진학하게 됐던 겁니다.”고 고교 진학에 얽힌 에피소드를 밝힌 적이 있다.

 

대광고에 진학한 후에는 자신이 원하던 경북고등학교에 진학을 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며 서울 신생팀인 대광고에서 뛰게 되어 오히려 잘 됐다 싶어 더욱 열심히 야구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키가 크지 않아서 걱정을 했다고 한다. 당시 160cm에 약53~54kg 정도 밖에 되지 않았지만, 당시 대광고 선우종 감독은 몸이 작아도 부지런히 뛰는 걸 좋게 평가해 2번 타자에 2루수를 맡겨 주었다고 한다.




 

흔히 신생팀이 그렇듯이 대광고 역시 첫해는 아무런 성적도 못냈다. 2학년인 19718월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제1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는 고교야구 사상 가장 많은 37개 팀이 참가했다. 지역 예선을 치르지 않고 모든 팀에게 출전 기회를 줬기 때문이다.

 

청량공고와 철도고 등 올드 야구팬들 기억에 남아 있는 팀들 가운데 예선을 거쳐 8강이 가려졌는데, 8강 팀 대진은 대전고-경북고, 선린상고-중앙고, 대구상고-영남고 등 전통의 강호들로 짜여졌다. 그런데 낯선 팀이 8강에 끼여 있었다. 바로 부산고와 김재박의 대광고였다.

 

그렇게 8강에 든 대광고는 급기야는 준결승에서 중앙고를 3-0으로 꺾고 경북고와 결승에 맞붙었다. 그러나 신생 팀의 돌풍은 여기까지였다. 대광고는 느린 커브를 잘 던진 팀의 에이스 이동한 선수가 역투를 했고, 안타 개수도 65로 팽팽했다. 하지만 경북고에는 당대 고교 최고 에이스 투수였던 남우식이 완투하고, 거기에 천보성(훗날 삼성라이온즈 창단 멤버)과 정현발(훗날 삼성라이온즈 창단 멤버) 등이 활약한 경북고에 0-1로 졌다. 그해 경북고등학교는 전국대회 6관왕이라는 놀라운 금자탑을 세웠다.

 

이듬해인 1972년 대광고는 부산에서 열린 제24회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에서 경북고와 다시 맞붙었지만, 이 경기에서도 0-1로 졌다. 이날 경기에서는 경북고 황규봉(훗날 삼성라이온즈 창단 멤버. 2016118일 작고)이 승리 투수였다. 그 무렵 경북고등학교의 전력을 알만한 대목인 것 같다.

 

야구팬들에게는 신생팀 대광고의 돌풍과 관련, 두 대회에서 당대 최고의 팀인 경북고등학교 강타선을 맞아 워낙 좋은 투구 내용을 보였던 이동한 투수에게 쏠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을 앞둔 김재박에게 3년전과 똑 같은 상황이 펼쳐졌다. 받아 주겠다는 대학이 없었다.

 

당시의 상황을 어느 인터뷰에서 김재박은 한양대에도 가보고, 중앙대에도 가보고 했는데도 받아주질 않는 거에요. 한데 그 이유가 3년전하고 똑같았습니다. 몸도 작고 실력도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한양대 감독은 3년 전에 경북고 감독이던 서영무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러니 저는 서영무 감독님에게 두 번 퇴짜를 맞은 셈이지요.”라고 담담하게 말한 적이 있다.




 

이런 와중에 김재박에게 반가운 소식을 준 이가 있었으니, 당시 대한야구협회 사무차장이었던 신현철(작고. 야구해설가로도 활약) 이었다.

 

김재박이 당시를 회상하며 인터뷰 한 내용이다. “하루는 신 선생님이 저를 부르시더니 곧 영남대학교에서 팀을 창단한다는 얘기가 있다며, 대구에 내려가서 입학할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한데 어디나 그렇듯이 창단 팀은 선수가 부족하게 마련 아닙니까. 저처럼 실력이 부족한 선수도 받아주더라구요.”

 

기구하다고 하기에는 설명이 안 되는 운명이다. 대구에서 서울로, 다시 대구로 그것도 신생팀에서 뛰는 김재박의 학생야구는 이렇게 진행형이었다.

 

영남대는 19733월 배성서 초대감독으로 야구부를 만들었다. 당시 배성서 감독은 대구은행 대리로 일하면서, 영남대를 이끌었다. 그해 전국체육대회부터 출전한 영남대의 창단 멤버로는 대건고 출신의 오문현 정도를 빼곤 무명이었다. 어쩜 김재박도 그 무명 속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재박의 야구는 영남대에서 꽃을 피기 시작한다.

 

신생팀이 그렇듯이 처음은 많이 어수선했던 모양이다. 김재박은 어느 인터뷰에서 팀을 창단한다고 해서 가 보니까 감독님도 없고 야구부 자체도 제대로 구성돼 있지 않고, 그런 상태였습니다. 선수도 저를 포함해서 12명 밖에 안되고, 그러니 무슨 대회에 나갈 수도 없었지요. 로테이션이 안되니까요. 배성서 감독님이 오신 게 그 해 6월인가 7월인가 그랬을 겁니다고 회상한 바 있다.

 

배성서 감독이 대구은행 대리직을 겸하다 보니, 3월에 팀이 창단되었지만 본격적인 감독 수행은 약 3개월 뒤부터였던 것 같다. 당시 야구 문화와 생태가 그랬다.

 

이어 김재박의 회고는 이어진다. “4년 뒤에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받아주는 데가 없으면 내 인생은 끝이다.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 절박한 마음으로 정말 열심히 운동했습니다. 야구 연습은 말할 것도 없고, 웨이트 트레이닝이나 러닝과 같은 기초체력 운동을 하루에 6~7시간씩 했지요. 그렇게 하다 보니까 키도 부쩍 크고 걸음도 빨라지고 어깨도 금세 강해지더군요

 

고등학교때까지 약163cm이었던 키가 170cm를 훌쩍 넘고 달리기도 100m 11~12초대에 끊을 정도로 빨라지는가 하면 자신도 모르게 어깨도 강해져 외야에서 홈으로의 중계플레이도 전담할 정도가 되었다.

 

이 시점부터 그라운드 여우’, ‘대한민국 대표 유격수김재박이 자라나기 시작한다. 김재박 선수의 인터뷰이다.

 

배성서 감독님이 (어깨가 강해져 외야에서 홈으로 중계플레이를 전담하는 걸) 보시더니 저를 유격수에 3번 타자로 기용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대회 출전은 하지 못했습니다. 아까 말씀 드린대로 선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었지요. 영남대 야구팀이 제대로 골격을 갖춘 것은 저희들이 2학년 올라간 1974년 초였습니다. 새로 15명의 후배들이 들어왔으니까요

 

1974424일부터 516일까지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대학 야구 춘계 연맹전이 영남대의 실전 데뷔 무대였다. 이 대회에서 영남대는 작은 파란을 일으켰다.

 

811패로 우승한 고려대에 1-3 패배를 안긴 것이다. 배성서 감독의 강훈련으로 한 단계 기량이 올라선 영남대는 오문현과 석주옥, 권영호로 마운드를 높이고, 권정화와 김재박이 타격 8위와 20위에 오르는 등 나름대로 타선에 짜임새를 더해 55패로 연세대와 공동 5위를 차지했다.

 

신생팀으로서는 대단한 성적이자, 성공적인 결과였다. 이 대회 최우수 선수로는 고려대 4번 타자 허구연이 뽑혔고, 홈런상은 연세대 김봉연이 차지했다.

 

영남대는 추계리그에서도 건국대에 이어 조2위로 4강에 오르는 성과를 올렸는데, 김재박은 이 대회에서 드디어 야구 선수 김재박이름 석자를 전국의 야구팬들에게 알렸다. 영남대 유격수 김재박은 단기 대회이긴 하지만 20타수 11안타 55푼의 높은 타율로 타격상을 받았다.




 

19754월에 열린 대학 야구 춘계연맹전에서 영남대는 81패로 창단한지 2년만에 우승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 대회에서 김재박은 만능선수로서 진가를 발휘했다. 김재박은 대회 마지막 날 투수로 출전, 성균관대에 6피안타로 완투하고, 선제 3타점을 올리는 등 투타에서 맹활약하며 30 완승을 이끌었다.

 

성균관대는 한양대 등과 522패로 준우승한 만만치 않은 전력의 팀이었다. 대회 최우수 선수는 유격수가 아닌 투수 김재박이었다.

19756월 서울에서 제1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가 열리게 된 가운데 대한야구협회는 국가대표 후보 선수들을 청군과 백군으로 나눠 531일과 614차례 경기를 치루게 했다. (축구는 화랑과 충무. 이 부분에 대해서 다음에 기사로 다룰 예정)

 

후보 선수들 가운데 유남호·정성만·박상열·정순명·강용수·이선희·정기혁·김재박 등 8명의 투수는 청군과 백군을 오가며 던졌다.

 

이 명단에 김재박의 이름이 보인다. 뒷날 프로야구에서도 마운드에 가끔 올랐던 김재박은 이 무렵 영남대의 준 에이스였다.




 

고교와 대학 진학 때 소외됐던 김재박이 각고의 노력 끝에 드디어 태극마크를 달았다. 김호중·강병철·김우열·윤동균·황성록·김차열 등 백전노장 선배들이 즐비한 가운데 김재박은 단연 막내급이었다.

 

에 대회에서 71무로 우승한 한국은 2차 리그 첫 경기에서 필리핀을 28-0이라는 경이적인 스코어 차로 이겼는데, 이 경기에서 김재박과 정기혁은 2안타만 내주면서 합작 완봉승을 거두었다. 또한, 54로 이긴 2차리그 호주전에서는 4번째 투수로 마운드에 올라 깔끔하게 경기를 마무리했다.

 

김재박은 이 대회에서 투수로는 2경기 9이닝 1, 타자로는 16타수 4안타(타율 25)을 기록했다.

 

그리고는 대학야구대회에서 유종의 미를 거둔다. 19764월에 열린 대학야구 춘계 연맹전은 풀 리그로 진행되었는데, 대회 마지막 날 영남대(72) 대 한양대(711)의 경기는 사실상 결승전이었다.

 

이 날 경기에서 영남대는 김재박 선발, 석주옥 계투(8), 정순명 마무리의 깔끔한 완투로 강호 한양대를 30으로 누르고, 2년 연속 우승을 자치했다. 이 대회에서 타율 부분은 장효조(한양대, 35타수17안타 타율 0.486)가 김재박(영남대, 36타수 17안타 타율 0.472)을 근소한 차로 누르고 1위를 차지했다.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3번째 우승하며 기세를 올린 대한민국은 70여년 야구 사상 처음으로 그해 8월 캐나다에서 열린 제2회 대륙간컵세계야구대회에 출전했다. 3위를 해 4강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김재박은 20타수 6안타(타율 3)로 선전했다.

 

1970년대 중반은 대한민국 야구사에 실업 야구 중흥기로 기록된다. 이 무렵 롯데와 한국화장품이 창단되어. 1960년대 중반 이후 두 번째 도약기를 맞았다.




 

김재박은 197611월 창단된 한국화장품에 정순명·황규봉·오문현(이상 투수), 심재원(포수), 김일환 ·조흥운(내야수), 김유동·정구왕(외야수)과 함께 입단했다.

 

이때부터 김재박 선수는 여러 국제 대회에 빠지지 않고 출전했다. 1976년 제9회 네덜란드 초청 국제 야구 대회. 자유 중국(. 대만)에서 열린 세계초청야구대회, 국제야구연맹(FIBA)과 세계야구연맹(FEMBA) 통합 제1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콜롬비아) 등이다. 이들 대회에 김재박은 내야수로 뽑혔지만 심심찮게 마운드에 오르기도 했다.

 

김재박은 1980년 성무(공군)에 입대했다. 당시 라이벌인 경리단(육군)에는 투수 김현재와 외야수 김일권 정도만 제대했고, 장효조와 김대진, 신언호 등이 입대해 전력이 탄탄했다. 하지만 성무는 투수 계형철, 내야수 천보성와 김정수, 외야수 김유동 등이 제대해 전력이 많이 떨어졌다.

 

19804월에 열린 제2회 부산시장기실업야구대회에서 경리단과 치른 결승전에서는 역전 결승 2점 홈런을 터트려 성무팀이 52 승리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김재박 선수가 최우수(MVP) 선수가 되었다.

 

19808월 캐나다에서 열린 제5회 대륙간컵대회에서 한국은 준결승에서 쿠바에 19로 진데 이어 3위 결정전에서 도미니카공화국에서 3-4로 져서 4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김재박은 출전 8개국이 풀리그를 벌여 상위 4개국에 준결승 출전권을 주는 예선 리그 호주전에서 홈런을 기록했고, 4강 진출의 최대 고비였던 캐나다전에서 최동원(83년 롯데자이언츠 1차 지명 투수. 2011914일 작고)과 합작하여 10 승리의 수훈갑이 되었다.

 

투수 최동원은 강호 쿠바를 21로 잡은 캐나다의 강타선을 상대로 8회 말까지 퍼펙트 게임을 이어 갔으나, 9회말 선두 타자에게 우전 안타를 내줘 아깝게 대기록을 놓쳤다. 김재박 은 1회초 희생플라이로 결승점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 대회에서 최동원은 최우수투수상을 받았고, 김재박은 베스트 9에 뽑혔다. 캐나다에 연고를 둔 토론토 블루제이스는 이 대회를 계기로 최동원을 영입하려 했고, 이듬해인 1981년 봄 서울 용산 미군 캠프에서 비밀리 테스트를 했다고 한다.

 

당시 야구를 잘 모르던 국민들에게도 김재박과 한대화라는 이름을 완전히 각인 시킨 제27회 서울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198294일 개막했다. 이 대회는 잠실야구장을 주 경기장, 인천구장을 보조 구장으로 사용했다.

 

대한민국은 4일 첫 경기에서 복병 이탈리아에 1-2로 역전패를 했다. 불안한 출발이었다. 그러나, 52차전에서 선동열의 5피안타 15탈삼진에 완투라는 빼어난 피칭으로 우승 후보인 미국을 21로 꺾었다.

 

6일인 대회 사흘째 되던 날, 대한민국은 보조 구장인 인천구장에서 네덜란드를 110 7회 콜드게임으로 격파한 반면, 일본은 이탈리아에 23으로 패했다. 일본의 패배와 한국의 승리로 대회 전체 판도가 크게 요동치게 되었다. 특히, 이탈리아는 이 대회에서 27패로 공동 꼴찌를 기록했는데, 2승이 대한민국과 일본에게 거둔 승리였다.

 

7일 일본은 자유중국(대만)32로 잡아 이탈리아전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났고, 대한민국은 8일 자유중국(대만)60으로 이겼다. 이 경기에서 선동열 투수는 5피안타 8탈삼진으로 완봉승을 거뒀다.

 

10일 대한민국은 파나마를 42, 12일 도미니카공화국을 30으로 이기고 대회 전적 61패로 일본과 공동선두를 이뤘다.

 

일본과 마지막 경기에 신경을 쓰던 한국은 13일 호주전에서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1971년 서울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처음 출전한 호주는 10여년 사이에 완전히 다른 팀이 되어 그야말로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8회까지 56으로 뒤지고 있던 대한민국은 9회말 장효조 선수의 동점타로 기사회생한 데 이어 일본과 야간 경기를 앞둔 14일 오전 연장전에 들어갔다. 대한민국은 15회까지 연장전만 2시간 가까이 진행된 가운데 유두열의 좌익수 희생플라이로 얻은 결승점에 힘입어 76신승을 거뒀다.

 

이로써 71패로 공동 1위가 된 대한민국은 대회 마지막 날 마지막 경기에서 일본과 사실상 결승전을 치룬다.

 

02로 뒤진 상태에서 운명의 8회를 맞았다.

 

8회말 선두 타자 심재원(포수)이 중전안타로 공격의 물꼬를 텄다. 이어 대타 김정수가 중월 2루타를 쳐내 1점차로 따라붙었다. 이어 조성욱 선수의 희생번트로 김정수 선수를 3루에 보냈다.




 

드디어 김재박 선수가 타석에 들어섰다. 일본 투수 니시무라 선수가 공을 뺐고, 김재박 선수는 멀리 나간 공을 치기 위해서 몸을 날리며 번트를 댔다. 일명 개구리 번트였다.

 

여기서, 김재박 선수는 자칫하면 싸인을 잘못 읽은 선수로 그리고 작전 수행 부족이라는 영원한 타이틀을 가지게 될 뻔했다. 사실 이날, 3루 주자 김정수 선수가 번트 사인을 받은 주자 답지 않게 상당히 늦게 출발을 했다.




 

이유는 이랬다. 김재박 선수는 어우홍 감독의 사인을 번트 사인으로 잘못 알고 바깥쪽으로 꽤 멀리 나간 공을 향해 몸을 날리며 번트를 댔다. 그러다 보니, 3루 주자 김정수 선수는 번트 사인이 아니었기에 스타트를 하지 않았다. 김재박 선수가 개구리처럼 점프하면서 댄 번트 타구가 3루쪽 파울라인 안으로 구르는 사이 3루 주자 김정수 선수가 홈으로 잽싸게 뛰어 그렇게 동점을 만들었다. 물론 김재박 선수는 1루에서 살았다.

 

결과가 좋으면 약간의 이상한 과정도 좋은 법. 감독의 사인을 잘못보고 바깥 쪽 멀리 나간 공을 마치 개구리가 뛰듯이 몸을 날려서 번트를 댄 기술은 그때는 물론이고, 지금에서도 신기(神技)에 가까운 수준이다.

 

이어 이해창 선수가 중전안타를 쳐서 1아웃에 주자 1,2루가 된 상태에서 기대를 모은 장효조 선수가 그만 땅볼을 쳐서 21,2루가 되었다. 이어 나온 한대화는 32스트라이크 풀카운트가 된 상태에서 일본의 바뀐 투수 세키네로부터 왼쪽 폴을 맞추는 대형 3점 홈런을 터뜨렸다.

 

그야말로 결정의 한방이었고, 역전의 한방이었다.

 

이 대회에서 최다승(3) 투수인 선동열 선수와 함께 김재박 선수는 포지션별 올스타로 뽑혔다. 쿠바가 빠지긴 했지만, 2년전 대륙간컵 베스트 9에 이어 또 다시 세계 최고 유격수로 인정받았다.




 

세계선수권대회를 마치고 우승 멤버 가운데 유일하게 그해 10월에 MBC청룡(지금의 LG트윈스 전신)에 입단해 프로 원년 멤버로 지금도 기록되고 있다.




 

하기룡·이길환·오영일 투수로 이루어진 마운드와 김재박, 이해창, 이종도 등으로 꾸며진 타선으로 그렇게 투타의 조화를 이뤄 1983년 후기리그 1위에 올랐다. 김재박 선수에게는 프로선수를 하면서 처음으로 팀이 1위를 하는 기쁨을 누렸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그해 한국시리즈에서는 20승 투수 이상윤과 재일동포 주동식의 역투에 한국시리즈 MVP 김봉연의 19타수 9안타 타율 0.474 8타점의 맹타 등으로 해태타이거스에게 14패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패하고 말았다.

 

1983년 한국시리즈에서 김재박 선수는 이렇다 할만한 활약을 펼치지는 못했고, 기회도 없었다. 이후 MBC청룡은 1990년초 럭키금성그룹(현재 LG)에 인수되었다.




 

‘LG 트윈스라는 새로운 유니폼을 입고, 1990년은 김재박은 프로 선수 생활 중가장 화려했던 해로 기록된다. 당시 36살의 노장이었던 김재박은 베테랑인 이광은·신언호 등과 힘을 모아 윤덕규·박흥식·김상훈 등의 후배 야수들을 이끌며, LG트윈스를 정규시즌 1위에 올려놨다. 그리고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정규 시즌 4위를 차지한 삼성라이온즈를 몰아붙여 한국시리즈 우승을 하게 된다. 김재박의 프로 생활 가운데 유일한 우승이었다.









 

다음해 91LG 구단은 김재박에게 은퇴를 권유했으나, 김재박은 현역으로 더 활동하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고 1992년 태평양 돌핀스(태평양 돌핀스는 1995년 현대로 인수되어 현대 유니콘스가 된다, 그러나 현대 유니콘스는 2000년에 수원으로 연고지를 이전을 하고,. 2000331SK와이번스가 창단되면서 현재까지 인천 연고팀이 됐다)로 팀을 옮기고 그 해 선수 생활을 마감한다.

 

지도자 생활은 트레이드 된 태평양 돌핀스에서 수석코치로 1993~1995년 역임을 하고, 현대 유니콘스 감독(1996~2006)과 그 사이에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2004, 2006)을 맡게 된다. 그후 자신이 처음 입단했던 팀인 MBC청룡의 후속팀인 LG트윈스 감독(2007~2009)을 역임한다.

 

여기서, 대한민국 프로야구사에서 왕조라고 불린 팀들이 4팀이 있다. 해태타이거즈(감독 김응룡 1983~1997), 현대유니콘스(감독 김재박 1998~2004), SK와이번스(감독 김성근 2007~2010), 삼성라이온즈(감독 류중일 2011~2014)이다.

 

이 왕조의 반열에 김재박 감독이 있다. 선수시절에는 그라운드의 여우로 지도자에서는 시스템 야구로 명성을 떨쳤다. 특히,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는다며 들떠 있던 2000년 시즌에는 무려 9124패로 2016년 두산베어스(93)가 깨끼 전까지는 한 시즌 최다승 팀에 등극한다.





돌이켜 보면, 김재박 감독은 1996년 현대유니콘스의 창단 감독을 맡아 ‘40대 돌풍을 일으키며 국내 프로야구 판도를 바꿔 놓았다. 첫 해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고, 3년 뒤 98년에 첫 패권을 차지한 이후 2000년과 2003, 2004년 연달아 우승 일구는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김재박 감독의 시스템 야구는 여러가지 정의가 있지만, 언제가 어느 인터뷰에서 밝힌 바와 같이 현장과 프런트가 시스템적으로 잘 돌아가는 팀에서 빛이 나는 야구를 뜻한다. 정리를 해 보면, 12년간 단장과 사장으로 재직하면서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김용휘 전 현대사장의 힘도 있었지만 그러한 지원을 바탕으로 운용과 기용을 누구보다 잘 했다는 평이다.




 

IMF 사태와 모기업 와해의 고비를 맞았지만, 김재박 감독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철저한 시스템 야구를 통해 자신의 야구를 후배선수들에게 이식시켰다. 팀의 간판인 박재홍·박경완·박종호 등이 다른 팀으로 이적을 했지만 곧 바로 그 빈틈을 매워 나갔던 것 역시 김재박 감독의 시스템야구가 큰 몫을 했다는 야구계의 평이다.

 

하지만, 마지막 감독 생활을 한 LG트윈스에서는 부상선수의 속출과 현대만큼 여러모로 탄탄하지 못한 지원 때문에, 제대로 시스템 야구를 펼치지 못했다는 야구계의 평을 뒤로 하고 감독직을 떠났다.

 

이후 감독직을 떠나 KBDO 경기감독관(2010~2016) 그리고 지금은 연천 미라클 팀을 비롯하여 여러 야구단에 재능기부를 하고 있다고 한다.

 

김재박... 그는 천부적인 소질을 바탕으로 교활(?)한 야구를 실천하고, 감독으로서 재창조한 영원한 그라운드의 여우였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는 언제나 자신을 갈고 닦은 훈련의 연속이 있었다.








 

 



(다음 3편은 배대웅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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