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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일성종합대학 대학생들의 반독재 항거

1988년 김대투서사건의 전말




대한한국 국민들이 북한에 대해 가장 호기심을 가지는 부분 중의 하나가 “왜 북한에서는 과거 남한에서 있었던 것과 같은 시위나 폭동, 군사정변이나 인민봉기가 없느냐?, 그런 과정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느냐?”라는 질문이다.

 

과연 북한에선 김씨 일가의 파쇼독재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없었을까?  2016년 10월 1일은 김일성종합대학 설립 70돌이 되는 날이었다. 이날을 즈음하여 2016년 9월 27일 김정은은 ‘주체혁명의 새 시대 김일성종합대학의 기본임무에 대하여’라는 서한을 김일성종합대학 교직원 학생들에게 보냈다. 서한에서 먼저 김정은은 김일성종합대학을 민족간부육성의 중심기지이며 주체과학교육 발전의 최고전당이라고 추켜세우면서 “대학이 걸어온 역사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영도의 업적이 깃들어 있다”고 제 할아버지와 아버지 자랑을 늘여놓았다.


김정은이 주장한 것과는 반대로 북한에서 김씨일가의 노예왕족독재에 누구보다 일찍이 반기를 든 사람들이 바로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부하던 지성인들이었다. 1950년대부터 60년대 사이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스탈린 우상화를 배격하는 운동이 거세지자 모스크바와 베를린 등지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김일성종합대학 출신 유학생들도 김일성 우상화를 강하게 비판했다. 급해 맞은 김일성 정권은 소련과 동유럽에서 유학생들을 모두 강제로 귀국시키려 했다. 일부 유학생들은 강제귀국을 거부하여 망명하였고 북한으로 끌려 온 유학생들은 정치범관리소에 감금되었다. 북한당국은 1970년대와 1980년대 초까지 유학생파견을 폐지하고 완전한 쇄국정치에 매달렸다.


북한이 다시 해외에 유학생들을 파견하기 시작한 것은 1984년 5월 김일성이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을 방문한 이후부터였다. 1980년대 김정일이 후계자 자리에 올라선 후에야 북한은 해외 유학의 문을 다시 열었다. 그러나 1988년 김일성종합대학 투서사건과 대학 총장이었던 황장엽 비서의 망명, 1990년대 동유럽에서 유학하던 김일성종합대학과 여러 대학출신 유학생들의 집단망명 사건들이 일어났다.

 

1980년대 사회주의는 그 결함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스스로 몰락해 가고 있었다. 그와는 반대로 사회주의 정치가들이 “몇몇 자본가들을 위한 사회”라고 비난을 아끼지 않았던 자본주의는 눈부시게 비약하며 승승장구의 길을 걸었다.


오늘날 세계의 모든 발전이 그러하듯이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 역시 그 앞장에 지식인들이 있었다. 당시까지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레닌의 ‘4월 테제’와 같은 낡은이론 속에 파묻혀 세계의 변화에 눈과 귀를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동독과 뽈스까(폴란드)를 비롯해 서방세계와 일정하게 연계를 유지하고 있던 국가들을 통해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도서들이 흘러들었다.

 

1980년대부터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지식인들이 중심이 돼 자본주의 철학연구와 필독활동이 비밀리에 확산됐다. 당연히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도 이런 도서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구소련과 동독, 헝가리 등 사회주의 나라 대학생들 속에서 널리 확산된 서방의 도서들로는 플라톤의 ‘국가론’, 토마스 홉스의 ‘사회계약론’, 이마뉴엘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과 같은 도서들이었다.


1930년대 이후 독일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에서 시작된 철학자 집단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주창하던 이성운동 ‘위대한 거부’는 당시 소련과 동유럽 지식인들의 양심의 표본으로 간주됐다. 이는 북한 유학생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동유럽사회주의가 무너지자 북한은 김일성종합대학 유학생 출신들 가운데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저서 ‘노예의 길’과 이마뉴엘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을 읽은 학생들을 모조리 색출했고 이를 읽은 학생들은 이유 불문하고 숙청했다.


동유럽에서 유학생활을 한 김일성종합대학 출신들 중에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저서 ‘노예의 길’이 제일 인기를 끌었는데 이는 사회주의 국가창시자 일리이치 레닌과 오랜 친구였던 미국의 시인 맥스 이스트만의 말을 인용한 때문이기도 했다. 사회주의에 현혹돼 소련으로 넘어갔다가 스탈린에 회의를 느끼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 온 이스트만의 비난은 김일성에게 현혹됐다가 김정일에게 분노를 느낀 북한 지식인들 정서와 비슷했다. 


하이에크가 인용한 이스트만의 비판은 “스탈린주의는 파시즘보다 낫기는커녕 더 열악하며, 더 무자비하고 야만적이며 불공정하고 비도덕적일뿐더러 반민주주의적이며 어떠한 희망이나 양심의 가책에 의해 속죄될 수 없는 초파시스트주의라고 묘사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였다. 이 문구는 유학생 출신들에 의해 1980년대 김일성종합대학에 유입됐고 동유럽사회주의가 붕괴되어 가던 1980년대 말에는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 속에서 김정일을 은유적으로 비난하는 문구로 활용되었다. 


지금도 북한에서 일부 친지들 사이에 오가는 말 중에 ‘히틀러는 자민족을 위해 타민족을 죽였지만 이건(김씨를 지칭) 자기 민족을 죽여 체제를 유지려는 가장 악한 제도’라고 비난하는 표현도 이때부터 이어져 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988년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일어난 투서사건은 북한에서 김일성종합대학 반란사건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1980년대 유학생 파견이 재개되면서 북한은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다며 김일성종합대학 자연과학부(이공계)분야의 자동화학부, 화학학부, 수학력학부, 생물학부 등에서 재학하는 1~2학년 학생들을 선발하여 국비장학생을 해마다 6백명 정도씩 동유럽국가들에 파견하였다. 유학생의 절반이상이 김대 출신들이었고 그들은 방학에 귀국하여 대학동창들과 만나 동유럽의 자유열풍에 대해 이야기들을 간간히 나누기도 하였다. 이들은 1980년대 동유럽국가들에서 일어나는 반사회주의 흐름과 자본주의 복귀의 열풍을 체감하기 시작하였다. 겉보기엔 평온했지만 동유럽 사회주의 붕괴는 사실상 1980년대 중반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당시 김대에서는 김정일의 지시로 ‘수재론’을 강조하면서 성적이 뛰어난 학생들에게 ‘우수학생증’을 발급해 주었는데 ‘우수학생증’이 있는 학생들은 인민대학습당이나 종합대학 도서관 서고에 직접 들어가 비공개도서도 볼 수 있었다. 의식화되기 시작한 이들은 점차 북한사회의 독재적 성격에 격분하기 시작했고 평양시의 우체국들에 익명의 투서로 김정일에게 정의의 사회를 구현할 것을 강조하는 의사를 전달하려고 하였다.

 

‘1988년 김대 투서편지 사건’으로 김대 대학 교내가 발칵 뒤집혔다. 1987년에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투서사건이 발생했을 당시엔 ‘3대혁명소조’로 지방에 파견되었던 저는 1989년 1월 휴가차 평양에 들렸다가 그 충격적인 내막을 접하게 되었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있었던 투서사건을 저에게 처음 들려주신 분은 북한의 유명 영화문학 작가인 민순실이었다. 평양시 만경대구역 광복거리에 살고 있던 그는 1986년 조선예술영화촬영소에서 창작해 김일성과 김정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은 예술영화 ‘사랑의 노래’의 시나리오를 완성한 작가로 북한의 영화계에서 명망이 높다. 예술영화 ‘사랑의 노래’는 평양산원을 중심으로 북한의 체제를 선전하는 영화였다. 민순실과 저의 가정은 오랜 친분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개성출신인 민순실작가는 고아로 우리 외가집에서 양딸처럼 자라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에 입학하였다. 나는 그를 이모처럼 따랐고 소조생활 휴가차 만나면 자주 만나 속을 터놓고 시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군 하였다.

 

1989년 1월에도 저를 반갑게 맞은 그는 서재로 데리고 가서 네 벽이 책으로 꽉 찬 서재가 요새처럼 느껴졌는지 그제야 큰 숨을 몰아쉬고 그동안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일어난 투서편지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투서편지 사건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1988 여름 평양시의 각 구역 체신소(우체국)들에 익명의 편지들이 다발적으로 신고 되었다. 보내는 사람의 이름은 밝히지 않은 편지 봉투들엔 받는 사람의 이름으로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께’라고 적혀져 있었다는 것이었다.


평양시 각 체신소 우체통에 투서된 편지의 내용은 북한의 체제를 신랄하게 비난 하는 꼭 같은 내용이었다. 우선 투서에서 김일성의 독재를 강하게 비난하며 낡은 사회주의제도의 연장으로 국가발전을 이끌 수 없다고 지적했다. 또 마르크스 ‘자본론’의 모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창조성을 억제하고 경제발전을 침해한다고 강조하고 북한사회 성분제도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투서에는 21세기가 눈앞에 닥쳐왔는데 아직도 봉건사회에서 권력을 유지하던 신분제도가 남아 있는 북한의 체제는 무계급사회를 지향하는 공산주의 이념과 완전히 상반되는 가혹한 노예사회이고 극악한 착취사회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출신성분이나 가정토대가 없는 진정한 무계급사회에서 능력 있는 사람들이 국가발전을 위하여 일할 수 있어야 나라가 발전할 수 있고 경제 활성화도 기대할 수 있다며 백두산줄기요, 낙동강줄기요 하는 사회계층을 부정했다. 그리고 북한의 권력층들이 만들어 낸 사회계층 제도에 의해 공부도 못하고 사회적으로 인성이 돼먹지 않은 자들이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후광으로 간부가 되고 있다며 “이를 비판할 자유마저 빼앗긴 인민의 삶은 과연 무엇인가?”라고 질문했습니다.

 

국가보위부가 투서와 관련해 김일성종합대학을 의심한 것은 그 주위의 체신소들에서 편지가 많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북한에서 일반주민들에겐 공개되지 않은 비밀들까지 폭로한 것도 김일성종합대학을 의심한 원인으로 됐다.


특히 투서편지가 북한에서 이미 사라진지 오랜 등사기로 인쇄됐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북한은 1970년대부터 타자기를 도입하기 시작했고 1980년대엔 주요 국가기관들에서 타자기가 일반화되어 등사기는 더는 찾아 볼 수 없었다. 투서는 파라핀과 바쎌린, 송진을 섞어 만든 등사잉크를 이용해 인쇄했는데 이러한 등사방법은 글을 쓴 사람의 필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결함이 있었다. 국가보위부는 김일성종합대학 재학생들을 상대로 투서에 나타난 필적을 대조하기 시작했다.


국가보위부는 우선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의 ‘생활총화’ 노트를 모두 회수해 필적을 조사한데 이어 대학 도서관에 드나든 우수학생들을 조사했다. 그러던 중 우수학생 9명이 같은 시각 도서관에 자주 모였다는 사실을 주목했다. 이들의 생활총화 노트를 조사한 결과 투서편지의 필적과 유사한 점도 다수 발견 됐다. 특히 이들 9명은 김일성종합대학 5학년과 6학년으로 성적이 뛰어난데다 졸업을 앞두고 있다는 사정도 모두 비슷했다.

 

국가보위부로부터 투서편지를 직접 받아 본 김정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이들 전원을 반드시 잡아내어 극형에 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수사망이 좁혀지자 투서편지를 쓴 우수학생들은 대학을 빠져나가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러나 이미 대학생들 속에 박아놓은 국가보위부의 첩자들이 주목된 학생들을 철저히 감시했고 국가보위부가 대학 주변을 그물처럼 둘러쌌다. 대학을 빠져 나가려던 학생들이 국가보위부에 잡히는 모습도 포착됐다.


사태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자 교내에 남아있던 한 학생은 1호 교사의 9층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그런 와중에서 도주한 3명을 체포하기 위해 국가보위부는 국경을 봉쇄하는 동시에 도주한 학생들과 친구들의 집까지 급습했다. 도주한 학생들은 대동강구역 외국대사관 촌에 은신해 있다가 잠복을 서던 국가 보위부 요원들에 의해 보름 만에 체포됐다. 이들은 모두 국가보위부에서 즉결 처형됐음이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부하던 고위급 자녀들을 통해 전해졌다.

 

당시 투서사건 소식은 소련과 독일, 웽그리아(헝가리) 등 동유럽사회주의 나라들에서 유학 중이던 김일성종합대학 출신 유학생들에게까지 알려졌다. 동유럽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많은 지식인들과 대학생들은 매일같이 시위를 하며 공산당의 일당독재에 저항했다. 놀랍게도 사회주의에 저항하는 시위군중 속에는 북한에서 온 유학생들, 김일성종합대학 출신 유학생들도 있었다. 당시 레닌그라드대학교, 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김일성종합대학 출신의 한 유학생은 아버지 김일성에서 아들 김정일로 권력을 넘기는 봉건적 세습을 강력히 비판하면서 북한의 파쇼화를 세상에 알렸다.


그는 북한 사회에 만연한 간신들의 아첨행위가 나라를 말아먹고 있다며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가인 소크라테스의 명언 “사냥꾼은 개로 토끼를 잡지만 아첨쟁이는 칭찬으로 우둔한 자를 사냥한다” 말을 인용하며 북한당국을 비난했다. 또 “악한 행위를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은 물론 자신에게 더 큰 상처를 입힌다”는 명언을 인용하며 노동당 간부들을 간신으로 비난했는데 그 이유로 모스크바에 있던 북한대사관 담당보위원에게 불려가서 사실 확인 조서까지 써야 했다.

 

대사관 서기관인 보위원이 “귀국준비를 하라”는 말에 문제의 심각성을 눈치 챈 그는 정치 망명을 결심하였고 국제경찰인 인터폴에 도움을 요청 했다. 급해 맞은 당시의 소련대사 손성필은 이 사실을 김정일에게 보고하였다. 비열하기 짝이 없는 김정일정권은 그 학생의 어머니를 소련까지 끌고 갔다. 국제형사기구 인터폴이 가족의 면회를 허용한다는 점을 악용해 아들을 설득하여 무조건 귀국시키라는 지시를 모스크바 주재 북한 대사관에 내렸다.


북한은 어머니를 보는 아들의 마음이 약해져서 동요할 수 있다고 어리석은 타산을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세계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던 모자의 상봉은 북한이 의도한대로 흐르지 않았다. 겨우 이루어진 상봉에서 어머니는 단호했다. 그 유학생의 어머니는 아들을 향해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조국에 가면 너는 용서가 아니라 처형될 수밖에 없으니 다 산 이 엄마를 생각하지 말고 네 결심을 끝까지 굽히지 말기를 바란다”라는 말을 남긴 후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는 인터폴의 도움으로 베를린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애인과 함께 서독으로 망명했다. 북한 당국이 가족들까지 끌어들여 유학생들의 귀국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은 동유럽에서 공부하던 북한의 대학생들을 크게 긴장시켰다. 서독정부가 북한 출신 유학생들의 망명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옛 동부독일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북한출신 유학생들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이들의 망명에 이어 소련과 다른 동유럽 나라들에서 공부하던 유학생들도 “북한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현대판 봉건왕조”라고 외치며 속속 망명의 길을 택했다. 이미 망명한 대학생들 말고도 소련과 뽈스까(폴란드) 등 여러 나라 대학들에서 공부하던 유학생들은 ‘서광’, ‘민주주의 학교’를 비롯하여 비밀독서회를 만들고 북한에서 독재체제를 허물기 위한 토론을 활발히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북한의 보위부가 모를 리 없었다. 훗날 이들이 몰래 가진 토론이 많이 알려졌는데 “사회주의는 자유로부터의 후퇴이며,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은 사회주의는 한갓 노예왕족 정치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는 내용들이었다. 이에 김정일은 노동당 과학교육비서였던 최태복을 모스크바로 파견했고 북한도 마치 동유럽사회주의 붕괴를 받아들이고 개혁개방의 길을 물색하는 것처럼 유도했다. 지어 개혁개방과 민주화에 유학생들이 앞장서야 한다고 호도했다.


또 유학생들에게 “조국을 방문해 휴가도 보내고 국가의 앞날도 논해보자”는 김정일의 지시까지 설명하며 귀국을 유도했다. 동유럽의 붕괴를 경험한 많은 유학생들이 북한도 이제는 자유민주주의밖에 길이 없다며 김정일의 꼬임에 넘어갔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김정일이 파놓은 죽음의 함정이라는 것을 이들은 몰랐다. 당시 김일성종합대학과 김책공업종합대학, 평양철도대학, 함흥수리대학, 청진금속단과대학 등에서 동유럽으로 공부하러 떠났던 유학생 수백 명이 귀국했다. 그들을 기다리는 건 평양의 아늑한 호텔이 아니라 국가안전보위부의 무서운 철창이었다. 이들은 전부 당과 국가를 배신했다는 누명을 쓰고 정치범수용소에 구속되거나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되었다.

 

김일성종합대학 투서편지 사건은 사회주의를 원칙적으로 고수하고자 했던 학생들이 북한의 왜곡되고 독재화된 사회주의를 바로잡으려는 의도에서 시도됐다. 때문에 사건의 전모를 알고 있는 학생들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 원칙주의자들의 조언을 무참히 짓밟아 버린 김정일은 결국 북한을 세계 최빈국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시절의 김정일처럼 아직도 공포정치로 권력을 유지하려 하는 김정은이 앞으로 북한의 인민들에게 어떤 가혹한 운명을 강요할지 불보듯 뻔하다. 이들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그들이 외치던 민주화의 목소리는 아직도 남아 언제인가 북한에서 자유의 큰 불씨가 되어 타오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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