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8.30 (목)

  • 흐림동두천 27.6℃
  • 흐림강릉 30.8℃
  • 연무서울 27.5℃
  • 대전 27.9℃
  • 구름많음대구 30.4℃
  • 구름많음울산 31.5℃
  • 구름많음광주 24.6℃
  • 구름많음부산 29.3℃
  • 흐림고창 28.2℃
  • 구름조금제주 34.4℃
  • 흐림강화 26.5℃
  • 흐림보은 28.9℃
  • 흐림금산 27.1℃
  • 구름많음강진군 30.1℃
  • 구름많음경주시 31.7℃
  • 구름많음거제 29.1℃
기상청 제공

정치

시인 정지용과 그의 아들 정구인의 기구한 인생

시인 정지용은 '6.25 전쟁' 때 죽지 않았다.
양강도 풍서군으로 추방, 훗날 정치범수용소행

시인 정지용과 그의 아들 정구인의 기구한 인생

 

술 한 잔을 하고 나면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그는 또 그 시를 읊었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 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는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시를 다 읊고 나서 어디라 없이 하소연한다. “이 시를 알아? 우리 아버지가 지은 시야. 우리 아버지가 정지용이야. 해방 전에 유명한 시인이었어. 지금 살아계셨으면 남쪽에 있는 가족들을 다 만났을 텐데

 

이산가족상봉 행사에 나온 정지용 시인의 아들 정구인


그가 해방 전 남한에서 유명한 시인이었던 정지용의 아들 정구인이었다. 북한이 여러 기회에 정지용 시인을 언급하면서 그의 아들 정구인도 양강도 풍서군에서 주재기자로 일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내가 양강도에서 문학 활동을 하면서 정구인에 대해 알게 된 것은 1994년이었다. 당시 정구인은 양강도 풍서군 방송위원회에 갓 입사한 기자였다.

정지용은 1990년대 초반까지 북한에서 생소한 시인이었다. 북한도 고급(고등)중학교 1학년에서 해방 전 문학을 배워주고 있다. 주로 카프(KAPF,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 계열의 작가들을 취급하는데 이상화와 박팔양, 라도향, 조명희, 최서해 등이다. 이중 최서해의 탈출기”, 리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원문 그대로 문학교재에 실려 있다. 카프 계열의 작가가 아니더라도 대표적인 향토시인으로 김소월을 특별히 소개하고 있다. 정지용이나 이광수, 이원수와 같은 시인들은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았다.

북한에서 반동 작가로 불리던 정지용, 이광수와 같은 시인들을 민족 시인으로 명예회복을 시켜 준 건 1992년이다. 1992년 김정일은 주체 문학론이라는 논문을 내놓는다. 이 논문에서 김정일은 해방 전 문학작품들도 모두 우리 민족유산이며 해방 전 문학작품을 적극 개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후 북한은 ‘6.25 전쟁시기 월북, 또는 인민군에 연행됐다가 숙청된 작가들을 찾아 나섰다.

그 중에서 춘원 이광수를 찾던 이야기는 북한의 문학인들 속에서 크게 회자되기도 했다. ‘6.25 전쟁이후 남한에서 월북하거나 인민군에 끌려간 작가, 지식인들 중에서 친일파, 반동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농촌 오지로 추방당했다. 이광수는 고향인 정주시의 한 농촌으로 추방돼 얼마 살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체 문학론이 나온 이후 이광수를 명예회복 시킨 북한은 그를 찾아 나섰으나 행적이 묘연했다. 해당 지역 출신들 중에서 나이 든 사람들을 모두 모아놓고 수소문한 끝에 겨우 묘가 있었던 지역을 찾았으나 그곳엔 이미 살림집들이 지어져 있었다. 살림집 세 채를 허물고 나서야 겨우 이광수의 뼈를 찾아 묘비를 세우고 다시 안장했다.

정지용 역시 ‘6.25 전쟁후 양강도 풍서군으로 추방됐다. 북한은 시인 정지용이 1950921일 미군의 폭격으로 경기도 의정부시 소요산 부근에서 사망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거짓말이다. 921일이면 아직 미군이 서울을 수복하기 전이다. 정지용과 친분이 있고 오랜만에 만났다는 북한작가 석인해가 묘비도 없이 그의 시신을 대충 묻고 북으로 도주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다. 북한은 남한 출신 지식인들을 추방할 때 한 곳에 몰아 보내지 않았다. 일정한 지역에 몰아넣으면 그들이 훗날 세를 결집해 반정부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정지용의 아들 정구인도 창작활동을 활발히 벌렸지만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등용한 작품은 없었다. 정구인은 내가 소속돼 있던 혜산방직공장 문학예술소조와 가까운 사이였다. 나는 2002년 가을 양강도 방송위원회 , 군 지도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혜산시에 들렸던 정구인과 술 한 잔 기울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 밤 정구인이 들려 준 이야기는 슬픔 그 자체였다.

정구인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1950년 인민군에 구속되어 있던 아버지 정지용을 서울에서 만났다. 당시 북한은 평양으로 끌고 갈 사람들을 따로 모아 구금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정구인은 아버지 정지용을 만났는데 그는 정구인에게 얼마 안 되면 전쟁도 끝날 것이니 집에 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인민군도 정구인을 구속하려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구인은 구속된 아버지를 그대로 둘 수 없어 곁에 남겠다고 인민군 간부들에게 사정을 했다고 한다. 인민군 간부들도 아버지 곁에 남겠다는 정구인을 제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정구인은 인민군과 한솥밥을 밥을 먹으며 아버지를 따라 평양까지 갔다. 평양에서 정구인은 미군의 폭격으로부터 파괴된 건물들을 허물거나 정리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6.25 전쟁이 끝난 뒤 북한은 국군포로들을 모두 청진시 김책제철소 복구공사에 동원했다. 그러던 1954년 국군포로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폭동을 일으켰고 폭동 가담자 1천여 명은 현장에서 처형당했다. 폭동에 가담했으나 북한군에 저항하지 않고 항복한 국군포로들은 아오지 탄광으로 보내졌다. 폭동에 가담하지 않은 자들은 비교적 좋은 대우를 받으며 북한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한국군에 포로가 됐다가 북한으로 돌아간 귀환병들도 모두 강선제강소, 지금의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에 배치돼 복구공사에 참가했고 이후 제강소 노동자로 전락했다. 월북하거나 인민군에 끌려간 지식인들도 마찬가지였다.

‘6.25 전쟁이 끝나자 북한은 월북한 작가들 중 친일파나 반동분자로 분류된 사람들을 깊은 산간오지로 추방했다. 정지용 시인이 추방된 양강도 풍서군은 개마고원에 자리 잡고 있어 주변에 철길도 없었다. “삼수, 갑산이 아무리 심심산골이라 해도 풍서군만 훨씬 도회지와 가깝고 살기도 좋다. 1958년까지 정지용 시인은 아들 정구인과 함께 풍서군 읍 협동농장에서 늘 감시를 받으며 살아야 했다. 그러던 1958년 정지용 시인은 아들 정구인만 남겨 둔 채 인민내무군(경찰)에 끌려갔고 그 후 더는 소식이 없었다. 1958년은 북한이 처음 평안북도 북창에 정치범수용소를 만든 해이다. 남노당 간부였던 이승엽의 아내와 외동딸도 전후 양강도 삼지연군 포태노동자구로 추방됐다가 1958년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다.

아버지가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자 외톨이로 남은 정구인을 누구도 돌보지 않았다. 고산지대 농사나 산나물을 전혀 몰랐던 정구인은 일을 제대로 못한다는 구실로 늘 비판을 받았다. “반동의 자식이 악의를 품고 고의적으로 일을 태만 하는 것 아니냐?”는 문초를 당해야 했고 늘 사상투쟁 무대에 올라야 했다. 당연히 그런 반동의 자식에게 딸을 주겠다는 부모도 없었다. 그렇게 정구인은 풍서군 읍 협동농장 농장원에서 소관리공으로 1992년까지 살아 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북한은 이광수와 함께 정지용을 민족시인으로 명예회복 시켜주었고 정지용의 아들 정구인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김정일이 주체 문학론을 내놓으며 해방 전 반동으로 몰린 작가들도 모두 민족 작가이며 그들이 쓴 작품들을 더 늦기 전에 더 찾아내라고 지시하면서였다.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북한은 뒤늦게 해방 전 시인들을 찾아 나섰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광수의 묘도 겨우 찾아냈고 정지용의 아들 정구인은 더욱 찾기 어려워했다



통일문학 대표 장혜명


당시 정구인의 행방을 알린 사람은 뜻밖에도 장혜명이었다. 장혜명은 양강도 풍서군 출신이다. 풍서군 문화회관에서 창작활동을 하던 중 문학에 관심이 높은 정구인과도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장혜명은 1986년 통일을 주제로 한 시들을 히트시키며 북한 문단에 혜성처럼 나타났다. 그는 김일성 종합대학 재학 중 오극열의 딸 오혜란과 결혼하면서 북한 통일전선부에서 작가로 활동하게 되었다. 정구인은 아버지 정지용이 명예 회복된 1992년 즉각 양강도 방송위원회 풍서군 주재기자로 임명됐다. 이후 1998년 양강도 방송위원회 풍서군 책임기자가 연로보장으로 퇴직하자 풍서군 책임기자로 승진했다.

양강도 방송위원회 , 군 지도부산하로 각 시, 군에 주재기자 2, 방송원 한명이 있다. , 군 방송은 하루 20분씩 방송을 한다. 정구인은 자신을 찾게 해 준 장혜명을 귀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장혜명을 좋은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물론 북한 당국의 감시 속에서 살아야 했으니 어쩔 수가 없었겠지만 그동안 장혜명은 통일문학편집국장, ‘6.15공동행사 북측준비 위원회 위원으로 남한을 여러 번 다녀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배 문학인이고 나이와 상관없이 친구이기도 했던 정구인에 대해 단 한마디도 없었다. 하다못해 친구의 이름으로,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 온 문학인의 이름으로 정지용 시인의 생가를 찾을 수는 없었을까?

정지용 시인의 문학관에 의미 있는 필적 한 문장도 남기기 어려웠을까?

언제인가 장혜명이 또 한국을 찾는 날이 올 수도 있다. 그때면 한국의 언론들, 정지용 시인의 직계 가족들은 따져야 한다. 정지용 시인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장혜명이 왜 이를 숨겨야만 했는지? 정구인이 살아 온 곡절 많은 역사는 과연 어떠했는지…   




日北 베트남 비밀 회담, 워싱턴 자극..트럼프, 中 비난하며 북중간 균열 노려 - 외견상 미일동맹은 어느 때보다 굳건한 것처럼 보이나, 국제관계는 영원한 동맹도 적도 없는 게 철칙이다 아이리쉬 인디펜던트는 일본이 지난 7월 베트남에서 북한과 "극비" 회동을 가졌고, 이 문제로 워싱턴이 "자극" 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도쿄 다니엘 드미트리우 특파원에 의하면 일본 내각 정보조사청 시게루 기타무라와 북한측 김성혜가 만나 납치 피해자 문제 등을 논의했다고 한다. 일본은 이 만남을 미국 정부에 통지하지 않았고, 워싱턴포스트에 의하면 이 일로 워싱턴 관료들이 일본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는 것이다. 싱가폴 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별도로 북한의 납치피해자 문제나 인권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일본은 1970년대와 80년대에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치된 최소 12명의 자국민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본국 송환을 요구했고, 3기 임기 준비 중인 아베 신조 총리도 日北 외교 정상화에서 이 문제가 주요 걸림돌로 남아 있다고 한다. 도쿄의 고위직 관료들은 이 문제에 관한 논평을 거부하면서, 일본인 납치 피해자 문제에 관해 반드시 미국에 의존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의 일방적 미북회담 - 김정은에 대한 노골적 구애라는 관점에서 일본측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