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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연재]만주의 조선인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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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주의 조선인들 ■■■

 

(18회/20회)

 

(훈춘{Hunchun, 琿春}사건)

 

‘소위 간도(間島) 지역은 1919년 조선에서 ’만세운동‘에 이어 1920년 공산주의자들이 합세한 독립을 주창하는 조선인들의 봉기가 광범위하게 일어났다는 것과 남동(南東) 만주에서의 이 봉기는 수개월 후 조선인들을 포함한 많은 인명 손실이 있을 때까지는 일본군대나 경찰에 의해 진압되지 않았다는 것은 기억되어야 한다’ (Suppl. Doc. p. 273)

 

‘조선 본국에서 일어난 사태에 대한 하나의 반작용으로서 1920년 간도(間島)에서 훈춘(Hunchun, 琿春)사건의 발생은 1920년 갑자기 귀환자 수가 4천명에서 1만명으로 증가하는 데서 보듯이 조선으로부터 이주가 줄어 가는 가운데 일어난 것으로서, 당시 만주지역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나타내 주는 사건이다.’ (Suppl. Doc. p. 264)

 

이 훈춘사건은 리턴보고서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사건은 알려진 것과 실제로 일어난 것 간에는 차이가 있다. 당시 조선인들 가운데서 살면서 일본인들에 의해 그들(조선인들)에게 가해진 충격적인 잔혹성에 대해 실제 목격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던 영국선교사들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수년 동안 일본정부는 간도(間島)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의 (조선독립을 위한) 민족운동을 분쇄할 기회를 엿보아 왔었다. 독립단(bandit)의 습격은 절호의 구실을 주었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간도(間島)에 징벌적 원정군대가 보내졌다.”

 

“1920년 10월 5일 일본군인들은 4개 분대로 나누어져서 조직적으로 공포통치를 시작했다. --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학살하고, 농토를 초토화했다. 그 외에도 조선인들과 중국인들 자신에 의해 이야기가 많이 전해졌다. 우리는 적어도 세 명의 캐나다인 목격자들의 증언을 확보하고 있다.” :

 

<증언 1>

용정에 있는 캐나다 감리교 선교회에 파송되어 있던 뉴파운드랜드의 마르틴(S. H. Martin) 박사는 일본인들이 지나간 지 이틀 후인 10월 31일 노라바위 마을을 방문한 후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

 

아래 기록한 사실들은 중국 기린(Kirin, 吉林) 성의 남부에 있는 간도(Kando, 중국발음으로는 Chientao - 역자 注)의 모든 지역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중국의 강력한 항의를 받고 일본은 아마도 가능하다면 특히 모든 젊은 남자를 포함해서 전 크리스찬 커뮤니티를 쓸어 버릴 의도를 가지고 1만5천명 이상의 군인을 이 지역에 파견했다. 마을마다 매일 조직적으로 불태워졌고, 젊은 남자들은 총살되었다. 현재 우리는 화재와 무차별 살해 또는 그 둘 다로 인해 피해를 본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일련의 마을들을 보고 있다. 다음의 사실들은 매우 적확하다;

 

“동이 틀 무렵 일본 보병이 크리스찬 마을인 노라바위(Norabawie)를 완전봉쇄하여 둘러쌌다. 그리고는 계곡 꼭대기에서 시작해서 아직 탈곡하지 않은 거대한 수수, 보리와 짚더미에 불을 지르고 난 후 집안에 있는 사람들을 밖으로 불러 세웠다. 아버지나 아들이 앞으로 나갈 때마다 그 자리에서 쐈고, 얼굴을 위로 한 채 넘어졌다. 아마도 반(半)은 죽었는데 그 위에 불타고 있는 짚더미가 던져졌다.”

 

“근거리에서 세 번씩이나 총을 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화염을 뚫고 일어서려고 했는데, (일본인들은) 창검으로 그들을 찔러 댔다. 거기서 피가 흘러 땅 위에 흥건히 나와 있는 핏자국을 나는 보았다. 그 시신은 곧 시꺼멓게 타서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어머니들, 부인들과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도 강제로 마을 남자들의 참상을 보도록 했다. 집들은 불태워졌고 곧 마을 전체가 연기로 가득 차서 이 마을로부터도 똑똑히 볼 수가 있었다. 일본 군인들은 흩어져서 주요 도로를 따라 계곡에 이르기까지 걸쳐 있는 다른 마을의 기독교 신자들 집도 불태웠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천황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돌아갔다.”

 

”우리가 인근 마을로 접근했을 때, 여자들과 어린애들 그리고 몇 명의 백발의 남자들만 보았다. 어린 아기들을 등에 업은 여자들은 소리쳐 울면서 아래 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나는 19개 건축물의 잔해를 찍었다. 그중에는 어머니와 딸들이 시신을 수습하고 있거나 불타고 있는 잔해 속에서 불타다 만 값진 것을 찾아내고 있는 동안 늙은 할아버지들은 머리를 쥐어뜯고 울고 있는 장면도 있었다.”

 

”우리는 살해와 방화가 있었던 32개 마을의 이름과 정확한 기록도 가지고 있다. 한 마을 주민 중 145명이 살해된 곳도 있었다. 여자들과 어린애들까지 통째로 불태워진 집도 있었다.

 

손웅퉁(Sonuntung)에서는 14명이 대형 무덤 앞에 세워져서 총살을 당했다. 그들의 시신은 나무와 기름으로 태워져서 훼손되었다. 이것은 전형적인 장면이다.“

 

 

- 계속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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