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12 (토)

  • 구름조금동두천 18.2℃
  • 흐림강릉 16.9℃
  • 구름많음서울 19.4℃
  • 구름조금대전 19.6℃
  • 구름조금대구 19.5℃
  • 구름많음울산 18.8℃
  • 구름많음광주 20.7℃
  • 구름많음부산 20.4℃
  • 맑음고창 19.8℃
  • 구름조금제주 22.7℃
  • 구름많음강화 18.7℃
  • 구름조금보은 18.5℃
  • 구름조금금산 18.4℃
  • 구름많음강진군 21.8℃
  • 구름많음경주시 19.1℃
  • 흐림거제 21.1℃
기상청 제공

오피니언

대한민국 건국의 숨은 주역-서북청년회(9)

- 다시 읽는 《서북청년회가 겪은 건국과 6.25》/손진 지음, 건국이념보급회 출판부

URL복사

 

위기를 넘기다

 

쌕쌕이 비행기(미군 제트기)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머리 위에서 기관총 쏘는 소리가 났다. 유치장 안에 있던 사람들은 엎드렸다. 잠시 뒤 총소리가 잠잠해졌다. 이때 보안원 둘이 축 늘어진 이규범을 유치장 안으로 내던지듯 밀어 넣고 갔다.

 

이규범은 의식이 없었다. 손진과 강창일은 피투성이가 된 그의 전신을 주무르며 “규범아, 정신 차려!” 소리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규범이 눈을 떴다. 그는 눈을 뜨며 동지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러고는 취조당한 이야기를 자세히 해주었다.

 

보안서장이 이규범에게 말했다.

“너희들 어젯밤에 낙하산으로 떨어졌지? 다 알고 있어!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 바른대로 말해!”

그는 몽둥이로 이규범을 때리기 시작했다. 때리다 지치면 교대해서 또 때렸다. 이규범이 비명을 지르며 억울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러자 보안서장은 “안 되겠어. 끌고 나가 처치해!” 하고 명령했다.

 

이규범은 보안서 뒤편 방공호 안으로 끌려갔다. 총살될 처지에 놓인 이규범은 마지막으로 '김일성 장군 만세'를 부르겠다고 자청했다. 그러자 그들은 “개새끼, 개소리하지 마!”라고 했다.

그때였다. 쌕쌕이 비행기가 방공호 위를 날며 드르륵드르륵 기관총을 쏘아댔다. 동시에 방공호 안 흙더미가 무너졌다. 그는 의식을 잃었다.

 

북한군은 미군 비행기에 대한 공포심을 갖고 있었다. 미군 비행기가 자기들만 골라 때린다는 착각에 빠진 것 같았다. 그들은 비행기 소리만 나도 숨을 곳을 찾았다.

 

손진 일행은 8월 22일 낮과 밤을 유치장에서 보냈다.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묘안이 없었다. 북한군이 그들을 처단하지 않고 하룻밤을 보낸 것만도 다행이었다.

 

다음 날, 그들은 다시 끌려나갔다. 이규범이 또 당했다. 나이가 어려 간단히 실토하리라고 생각한 듯했다. 그러나 이규범은 나이는 어려도 서북청년회의 반공 투사였다. 국방부 제4국(첩보부대)에서 근무한 전력을 가진 청년이기도 했다.

 

이번에는 보안서장이 강창일을 상대로 조사했다.

“동무가 우리 당(남로당)에 있었다면 무엇 때문에 부산까지 피란 갔는가?”

“전쟁이 나서 간 게 아니오. 그 전에 체포령이 내렸기 때문에 부산으로 갔던 것이오. 서울이 인민군에게 해방되었다기에 서울의 집을 찾아가는 중이었소.”

강창일은 힘주어 말했다.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

 

괴나리봇짐을 메고 밀짚모자를 쓴 피란민 차림의 청년이 보안서장 앞에 나타났다. 그는 신분증 같은 것을 제시했다. 보안서장은 벌떡 일어나 거수경례를 했다.

그 청년이 조사받고 있던 손진 일행을 살폈다. 이규범과 시선이 마주쳤다.

 

“동무, 회령서 왔지요?”

이규범의 안색이 하얘졌다.

손진은 그때 '이젠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정체를 잘 아는 사람을 만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규범이 함북 회령에서 월남한 것은 사실이었다.

 

“동무가 남반부에 와서 무엇을 했는지 내가 말해 볼까요?” 청년이 말했다.

두뇌 회전이 빠른 강창일이 벌떡 일어서서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러고는 단호한 어조로 이규범을 옹호했다.

“전쟁 전에 우리 당(남로당)이 불법화되어 비합법 투쟁을 전개하다 보니 필요에 따라 경찰에도 침투하고, 서북청년회에 가담하기도 했소. 이규범 동무는 나와 열성으로 투쟁하다가 신변에 위협을 느껴 부산에 피신했다가 서울이 해방되어서 서둘러 가는 중이오”라고 주저함 없이 말했다.

 

그러자 그 청년의 태도가 갑자기 바뀌었다. 긴장이 감돌던 분위기도 달라졌다. 청년은 그들이 부산에서 왔다는 말에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부산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다. 어느 정도 궁금증이 풀렸는지 청년은 한숨을 쉬며 “실은 나도 부산에 가는 중이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규범의 창백해진 안색도 생기가 돌았다.

 

“매형과 누님 모두 안녕하십니까?”

이규범과 청년은 사돈 간이었다. 그러니까 이규범의 누이가 청년의 형수였다. 청년은 해방이 되고 나서 고향인 함북 회령에서 열성적인 공산주의자로 공청 위원장을 지냈다.

 

8월 24일 북한군 대위와 소위가 유치장 안을 들여다보았다. 손진을 불러냈다. 그들은 정치 장교였다. 손진은 그들 두 사람과 마주 앉았다. 그는 그들을 굴복시킬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

 

북한군 대위가 말문을 열었다.

“동무가 서울에 가는 목적이 뭐요?”

손진은 어떤 굴욕을 당해도 흥분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특별한 목적이 있는 건 아니오. 다만 아직 젊으니, 해방된 서울에 가서 적성에 맞는 일을 해보겠다는 막연한 생각뿐이오.”

“동무는 남반부에서 무슨 일을 했소?”

“해방 후 잠시 서울에서 학병거부동맹에서 활동하다 건강을 해쳐서 고향인 경북 영천에 내려가 중학교 교사 노릇을 했소.”

손진은 꾸며서 말했다. 그러자 북한군 대위가 말했다.

“동무는 이승만 괴뢰 정권 밑에서 선생 노릇을 하면서 애국 학생을 얼마나 감옥에 보냈소?”

“동무는 남반부 실정을 잘 모르오. 남반부 교사들은 이승만 정부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반대파도 있고, 이도 저도 아닌 정치에 무관심한 중간파가 많소.”

“그럼, 동무는 어느 쪽이오?”

“이도 저도 아닌 중간파라고 할 수 있소.”

“동무는 비교적 솔직하오.”

 

손진은 내심 안심했다. 여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쳤다고 말했다. 사상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과목이라 논란거리가 되지 않았다.

대화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손진은 서울에 가서 무엇을 할 거냐는 그들의 질문에 문학에 다소 취미가 있어 그 방면에서 활동할 생각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월북 작가 이태준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북한군 대위가 말했다.

“이태준 동무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고 있소? 이태준 동무는 지금 팔공산에 있소. 한 손에는 총을 잡고 한 손에는 펜을 들고 참호 안에서 창작을 하고 있소. 그에 비해 남반부 작가들은 썩어빠졌소. 공화국의 당면 과제는 이승만 괴뢰 집단을 부산 앞바다에 밀어 쳐넣는 것이오.”

‘네가 아무리 떠들어봐야 전쟁은 시간 문제야. 우리가 이겼어.’ 손진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의용군에 끌려가게 될 운명

 

그들이 갑자기 당면 과제 운운하며 열변을 토하는 이유를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다.

“동무들도 공화국의 당면 과제 달성에 참여하는 게 어떻겠소? 우선 공을 세우고 각자 할 일을 찾아야 합니다. 어떻소? 의용군에 지원할 생각은 없소?”

 

손진은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납득가지 않는 게 있었다. 당시는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과 같은 시기였다. 의용군도 당사자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냥 강제로 보내면 될 일이었다.

우선 의용군으로 가겠다고 대답하는 길밖엔 없었다. 그러나 당장 대답할 마음은 없었다.

“갑자기 받은 제안이라 뭐라 답할 수 없소. 하룻밤 시간을 주오.”

 

유치장으로 돌아온 손진은 강창일과 이규범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우선 의용군에 가겠다고 해야 한다는 의견을 모았다.

8월 25일. 북한군 대위와 소위가 찾아왔다. 유치장 창살을 사이에 두고 물었다.

“결심이 섰소?”

손진 일행이 가겠다는 의사를 표시하자 유치장 문이 열렸다. 보안서장이 불만에 찬 표정으로 그들을 응시했다. 반동분자가 확실한 그들을 제 손으로 처단하지 못하고 풀어주는 게 억울한 듯했다.

 

문제는 손진 일행을 괴산군 내무서까지 호송하는 방법이었다. 보안서장은 전체 인원이 4, 5명밖에 안 돼 보안 대원 차출이 어렵다고 했다. 무기도 M1 소총 2자루뿐이었다. 그러나 북한군 대위는 단호했다. 손진 일행을 의용군에 입대시키라고 지시했다.

 

연풍면 사무소에서 괴산 구청까지는 40리 거리였다. 호송 대원 둘 중 한 사람만 무장했다. 그들은 어느 모로 보나 시골 사람들로 군에 근무한 경력이 없어 보였다.

 

손진 일행은 4박 3일간 유치장 생활을 하다 나와 바깥 공기를 마시니, 살 것 같았다. 고문을 당했던 이규범도 다행히 괜찮았다.

 

무슨 영문인지 북한군은 손진 일행 세 명을 포승으로 묶지도 않았다. 그들이 앞서 걷고, 그 뒤를 호송 대원 둘이 5m 정도 떨어져서 뒤따라 왔다. 길을 재촉할 필요는 없었다. 천천히 걸었다. 긴장감도 사라져 다섯 명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손진, 강창일, 이규범은 저마다 도망칠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탈출에 성공한 뒤 계속 북쪽으로

 

“동무들 더운데 목욕이나 하고 갑시다!”

손진이 먼저 냇물에 뛰어들었다. 총을 든 사람만 남고 모두 냇물에 몸을 담갔다. 보안원 하나가 먼저 나가 총을 들고 있던 다른 하나와 교대했다. 손진, 강창일, 이규범도 따라 나왔다. 세 사람이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이규범이 날쌘 동작으로 총을 낚아챘다.

 

총을 뺏긴 보안원 하나가 멍하니 바라봤다. 강물에 들어간 보안 대원 하나가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는지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그들은 보안원 둘을 간단히 처치했다. 대한유격대 손진 일행은 서울로 가기 위해 괴산읍을 오른편에 두고 진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행인이 없는 험한 산길이었다.

 

8월 30일. 산중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진천을 빠져나와 국도를 피해 ‘도령길’을 따라 북쪽으로 계속 갔다.

사과 과수원에 들렀다. 청년 두 명이 과수원 마당에서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이 지방 공산당 조직인 민청의 간부들이었다. 그들은 전향한 공산주의자들의 단체인 보도연맹에 들어갔던 사람들이었다. 후퇴하는 경찰이 뒷산으로 끌고 가 집단으로 처형하려는 순간 운 좋게 살 수 있었다.

 

그 사건은 6.25 남침 초기에 서울에서 일어났던 일 때문에 일어났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우리 경찰이 다급하게 서대문형무소와 마포형무소의 좌익 죄수들을 그대로 두고 후퇴했다. 감옥에서 나온 좌익과 일부 보도연맹원들이 경찰 가족과 우익 인사들을 살해했다. 이 만행이 남쪽에 알려지자 후퇴하는 경찰이 보도연맹원들을 처형하는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은 김일성의 무력 남침으로 발생된 비극이었다.

 

손진과 그 동료들은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 경기도 땅에 들어섰다. 멀리 농가에서 사람들의 움직임이 보였다. 전선이 한참 떨어져 있어서인지 겉으로는 조용했다. 북한군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수원 시내를 빠져나왔다. 저수지를 우측에 두고 걸음을 재촉했다. 강창일이 절뚝이며 뒤처졌다. 발바닥 여러 곳에 물집이 생겨 더는 걸을 수 없다며 주저앉았다.

손진과 이규범도 물집이 생겨 터졌다가 또 생겼다. 신발 밑창이 가운데만 남기고 닳아 없어져 양말을 이리저리 돌려 신었다. 맨발이나 마찬가지였다.

 

잠깐 쉬기로 했다. 석양이 노송 사이로 길게 비쳤다. 하늘로 치솟은 소나무가 석양과 조화를 이뤄 아름다웠다. 지칠 대로 지친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길가 농가 한 할머니에게 부탁해 닭 두 마리를 푹 고아 꽁보리밥과 함께 먹었다. 오랜만에 하는 포식이었다. 그러고는 곯아떨어졌다.

 

8월 31일. 곧 서울에 도착하리라는 기대감에 심장이 뛰었다.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서울이었지만, 대한유격대의 싸움터이자 자신들의 백골이 묻힐 땅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설렜다.

 

영등포를 지나 여의도 백사장에 이르렀다. 북악산과 남산이 보였다. 폭파된 한강 인도교와 철교는 흉했지만, 서울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정다웠다.

 

마포를 드나드는 전차는 그대로 운행하고 있었다. 서대문에서 전차를 내려 시계를 보니, 오후 4시가 조금 지났다. 손진, 강창일, 이규범은 남대문 지하도 남측 입구에서 다음 날 정오에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어디로 누구를 찾아갈지 막연했다. <계속>

 

 

 

 

 

 




포토뉴스

더보기



외교

더보기

오피니언

더보기